▲카메라와 여벌 옷, 일부 공구 등 1.5kg의 욕망을 덜어냈다.
김병기
아내와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물품부터 구입했다. 팔토시와 발토시 2장, 목플러와 면마스크, 장갑, 긴급 수리할 공구세트와 자전거에 부착할 작은 가방과 우비. 휴대용 펌프와 펑크 난 바퀴를 수리할 패치 세트는 미리 사 놓았던 것을 쓰면 됐다. 그걸 꺼내는 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방 구석에 밀어 넣었다.
휴대폰에 부착할 카메라 렌즈 세트와 동영상 파일을 옮길 수 있는 4테라짜리 외장 하드도 큰 맘 먹고 샀다. 안장통을 덜어줄 기능성 팬티 2장도 구입했다. 쫄바지 한 장을 매일 빨아 입어도 되겠지만, 평소에도 비호감이었다. 볼품없는 신체 윤곽이 드러나는 걸 피하고 싶었다. 대신 반바지와 땀을 잘 흡수하는 윗도리 2벌도 샀다.
여기에 여벌옷과 세면도구, 카메라, 휴대용 동영상 촬영기기, 노트북과 셀카봉, 핸드폰 거치대 등을 가방에 넣어서 무게를 재니 8kg이 넘었다. 이걸 등에 지고, 또는 가뜩이나 무거운 MTB 자전거 뒷자리에 매달고 700~800km를 달릴 수 있을까? 문득,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수없이 산에 올랐던 박그림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등산은 무게와의 싸움이지."
욕망을 내려놓아야 즐길 수 있고, 버틸 수 있다는 뜻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자전거 여행도 다를 게 없었다. 결국 카메라와 여벌 옷, 일부 공구 등 1.5kg의 욕망을 덜어냈다. 여행지에서 필요할지도 모를 빈 공간을 확보했다.
[날씨] 최악 폭염 특보, 열사병 사망자 00명...
그러자 또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열대야 지속될 듯' '폭염특보... 열사병 사망자 00명' '강릉,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격상'
심상치 않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약간이라도 과로하거나 과음하면 탈이 났다. 노화의 신호였다. 출발일이 다가오자, 나의 일탈을 응원해오던 두 딸과 아내의 걱정도 늘었다.
"아빠, 땀을 많이 흘릴 테니 커피와 이온 음료를 계속 마셔야 해요. 혹시 모르니 강심제 처방을 받아서 약을 타가면 좋은데."
"당신도 늙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천천히, 절대 무리하지 말고요."
여행을 앞두고 노선도 파악하고 영상을 만들 요량으로 유튜브를 봤더니 라이더들은 속도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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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전쟁을 치르듯 자전거를 탔다. 이들의 내비게이션에는 '숨'과 '쉼'이 없었다.
[속도] '숨'과 '쉼', 해안선 1만리 두 바퀴 산책

▲부산 감천감성마을 입구
김병기
카카오맵으로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부산 을숙도까지 자전거 거리를 찍었다. 516km였다. 7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가 포항을 지나면서부터 28번, 35번 등 내륙의 국도로 갈아타는 노선이다. 주행시간은 33시간 42분, 평균 속도는 15km정도였다. 매일 8시간 120km를 달린다면 4일이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자전거를 몰고 지옥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나마 일상의 과속 궤도에서 탈선해서 산책을 하고 싶었다. 사실 50대 중후반의 체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이기도 했다. 나는 '숨표'와 '쉼표'를 넣어 거리를 다시 쟀다.
안장에서 내려 매일 1~3곳의 역사문화 공간, 나보다 먼저 그곳을 다녀간 이들의 시공간에 잠시 멈출 것이다. 새벽 항구에서 어부의 삶을 엿보는 시간도 일정에 넣었다. 사진과 영상도 찍어야 했다. 가급적 동해안에 바짝 붙어서, 네비게이션이 지시하지 않는 길에도 두 바퀴를 찍으며 빈둥빈둥 해찰할 여유를 갖고 싶었다.
포항에서 내륙 국도로 새지 않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더니 실제 주행거리는 726.1km였다. 길에서 헤매는 거리를 합치면 거의 800km는 될 것 같았다. 10일 동안 자전거를 탄다면 매일 80km를 달려야 한다. 10구간으로 나눠 여행 일정을 다시 짰다. 주행 거리는 늘었지만, 속도는 늦췄다.
[거리] 매일 80km 10구간... 동해의 바람을 가른다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 대진 고속버스 티켓을 끊었다.
김병기
1구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낙산사까지, 2구간 강릉 허균허난설헌기념관, 3구간 맹방 해수욕장, 4구간 망양정 해수욕장, 5구간 영덕 해맞이공원, 6구간 일월사당, 7구간 문무대왕 수중릉, 8구간 울산 병영성, 9구간 해운대 달맞이공원, 10구간 을숙도 생태공원까지이다.
하지만 이에 얽매이지 않고 놀면서 쉬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달려볼 생각이다. 해송 숲 어디선가, 어느 바위 그늘 아래에서 졸기도 할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길을 내왔던 역사 속 군상과도 마주하면서 두 바퀴로 동해의 바람을 가르고 싶다.
2021년 7월 25일 오후 1시35분, 나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싣고 강원도 고성군 대진시외버스터미널로 떠났다. 올해 동해안에서 시작해서 내년에는 남해안과 서해안까지, 우리나라 해안선 1만리 여행의 첫 발을 뗐다. 두 바퀴로 달리는 나의 새길 앞에 무엇이 돌출할지, 두렵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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