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팬서>의 스틸컷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달라지는 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는 무협 영화의 온갖 설정과 배경들이 뒤섞여 존재하고 이 영화의 액션에는 우리에게는 성룡의 영화로 친숙한 동양계 무술영화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다. 만약에 이 작품이 전형적인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영화였다면 이런 식의 설정과 배경은 절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천년 넘게 막후에서 세계를 지배해온 무협 세계의 1인자가 양조위고 그의 아들이 시무 리우인 건 말이 된다. 하지만 같은 캐릭터를 조지 클루니와 잭 애프론이 맡는다고 생각해 보라. 일단 그들은 전혀 동양인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쩌다 백인들이 과거 동양의 무협 세계를 제패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텐데, 이건 어떤 방식으로 해도 지나치게 가짜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무협 영화의 세계가 진짜가 아니긴 하지만 그 가공의 역사가 동양인이 가득한 동북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것에 관객들에게 아주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도 비슷하다. 이 영화도 어쨌거나 핏줄을 이은 왕위의 계승자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도전자를 물리치고 정통을 이어나가는 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서구인들의 기준으로 적당히 이국적인 동네 한 군데 정도로 로케이션을 가는 당시 마블의 경향까지 아주 판박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트찰라는 흑인이었고 채드윅 보스만이 그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기존의 마블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모든 요소들을 아무 설명 없이 사용하는 게 가능해진다.
영화의 배경을 아프리카 대륙의 가상 국가인 '와칸다'로 삼을 수 있고 작품의 배경이나 의상 등 모든 요소에 그 지역의 고유문화를 뒤섞을 수 있다. 이 또한 캐릭터의 인종이 백인이었다면 성취할 수 없는 개성이었다.
다양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이유
물론 <샹치>와 <블랙 팬서> 모두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제작되기 전에 그들의 인종과 국적은 모두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두 영화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주연을 맡은 게 엄청난 파격은 아니라고 볼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다만 스튜디오가 필연적으로 비(非)백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쓸 수 없는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한 건 동양인이나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쓰기로 결정한 것과 사실상 같지 않을까.
지금까지 대중영화 속 주인공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늘 있었다. 어쩌면 이 글의 결론도 비슷하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데 주연을 포함한 캐스트의 다양성은 이제 불가피한 선택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것은 비단 프랜차이즈 영화만의 문제도 아니다. 대중영화 제작이 까다로운 건 사람들이 지나치게 낯선 영화에는 선뜻 지갑을 열지 않지만 또 익숙한 반복에는 쉽게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권선징악의 서사는 농담거리지만 동시에 이 문법에서 벗어나버리면 관객들은 찜찜한 감정으로 극장을 떠나게 되고 입소문은 영 시원치 않게 된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하는 딜레마가 대중영화에는 존재한다.
인종·성별·민족·성정체성 등이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는 건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다. 익숙한 서사를 반복하면서도 그 영화 안에 다양한 인물들의 출신지와 소속된 고유의 문화, 그들이 발전시켜 온 장르의 요소까지 이질감 없이 도입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여전히 익숙한 백인 남자들의 놀이터가 파괴되는 것에 불만인 사람도 있지만 다양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린 이유다(물론 이런 배경이 있음에도 마치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처럼 소수자 캐릭터를 하나 둘 던져주는 제작자들의 행태가 솔직히 고까울 때가 있다).
이는 비단 할리우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익숙함만 존재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린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특정 성별과 집단의 인물들이 한국 대중영화의 주인공을 독점하는 경향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선택지를 골라보는 것이 새로움을 만들 첫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대중영화의 조명을 충분히 받지 못한 소수자들은 한국에도 분명 많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