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상업극 - 마카다미아, 표절, 메르스 그리고 맨스플레인> 포스터
사진:김도웅, 공연:여기는 당연히, 극장
- 때로는 그런 부조리함을 맞닥뜨리면 절망감에 빠지거나 분노에 휩싸여 무너질 수도 있는 것 같은데.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공연들을 해마다 해오고 있다. 이 공연을 그만할 수 있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올해도 세월호특조위 활동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기소된 내용 또는 밝혀진 내용이 없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가 그와 관련된 공연을 했다고 해서 절망할 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지금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것을 보면 '뭘 했다고 내가 의기소침해지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기후위기에 대해 작업을 하고, 작업을 위해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우울감이 있다. '다 망했다. 우린 다 죽을 거야, 인간은 지구를 너무 망쳐놨어, 텀블러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데 그럴 때면 '그렇게 절망한다고 어쩔 것인가, 누가 대신 (운동을) 해주나'라는 생각을 한다.
함께 기후위기에 대해 연극작업하고 있는 동료들과 힘들어질 때면 비건 식사를 하러 간다. 비건 식사를 함으로써 이 한 끼로 오늘 한 마리는 구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힘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 절망에 빠져들어 가면 작업하기 어렵다. 작업은 출구가 없으면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다. 고민하면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극계의 성폭력에 대한 공연인 <가해자탐구_부록:사과문 작성 가이드>(2017년작)를 했을 때는 연극계 내의 미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연극계 미투운동은 2018년 2월에 본격화되었다). 예술계 내에서 온라인상으로 미술, 문학, 영화 등에서는 #metoo라는 해시태그로 미투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아무리 기다려도 연극계의 미투 해시태그는 나오지 않았었다. 연극계 미투는 다른 장르에 비해 늦었었다. 늦었지만 뜨거웠다. 온라인 상에서 해시태그로 미투 운동을 하는 것조차 우리(연극계)는 쉽지 않구나, 라고 느꼈다.
그때 공연했을 때 연극인들이 많이 보러 오지 않았었다. 우리 공연을 많이 보러 오던 사람들도 오지 않았었다. 그때 공연이 끝나고 허탈하게 쉬고 있었을 때, 이 문제를 공연으로 해도 미투가 안 나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로 연극계 미투가 터지면서 성폭력 반대 연극인 모임이 생기고, 지치지 않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웃사이더'들과의 공동전선
- 동아연극상에서 연기상을 받기도 했던 연극 '우린 농담이 (아니)야'에서는 성 소수자와 차별의 문제가 일종의 사회적 선언으로 발화되는 것 같았다.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은 거짓말을 하면서 사는 게 피곤하고, 스스로 어설프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퀴어 동료들이 연극계에 있었고, 커밍아웃을 못 하고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우리끼리는 상의하고 힘을 받으며 지냈었지만 내가 모르는 퀴어 동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퀴어 프라이드에 관해 이야기하고 힘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면서 나 역시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퀴어들끼리는 '커밍아웃은 평생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번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을 해야 하고, 어떤 맥락인지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5년 전 생일날 페이스북으로 처음 커밍아웃을 했었다. 그 후로 해마다 우리 극단에서는 내 생일날 '이리가 커밍아웃한 지 몇 주년이 되는 해'다, 라고 페이스북에 업로드한다.
커밍아웃 축하를 받고 싶어서 일부러 생일날 커밍아웃을 했다. 커밍아웃을 축하해야 할 일이라는 걸 아직은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일단 생일에 커밍아웃하면 축하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영화 매트릭스처럼) 빨간약을 먹고 '됐다'라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지만, 아니다. 백래시는 계속 있고, 성차별주의자들은 꾸준히 등장하고, 혐오가 이어지고 있다. 또 페미니스트들은 계속 싸우고, 새로운 책이 나온다. 그러니 계속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다.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어떤 공연을 하면 그 내용에 대해 리서치하고 책을 보고 공부하게 되는 것 같다."
- 지금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신작이 기대된다. 소개해달라.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구자혜 연출은 스스로 작품도 쓰고 그걸 연출도 하는데 이번에는 <로드킬 인 더 씨어터>라는 창작극을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10월 말에 공연할 예정이다.
또 '바람 컴퍼니' 거리공연팀과 동물실험에 관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수원 연극제에서 공연할 예정인데, 이 거리공연팀은 지속적으로 동물권과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예전에 <고기, 돼지>(2019년작)이라는 공연으로 공장식 축산과 환경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 새로 창작하는 작품은 아직 제목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수원 탑동시민농장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수원 탑동시민농장은 과거에 동물실험을 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이다. 이제는 연극에서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퀴어연애물 연극에 도전해보고 싶다."
이리 배우와의 대화가 끝난 후 나는 바로 서점으로 향했다. 인터뷰 중, 그에게 '내 인생의 책 3가지만 꼽아달라'고 했을 때, 이리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질문이 이 정도로 고민이 될지 몰랐다 (웃음) 세 권 뽑기가 너무 어려웠다.
<시스터 아웃사이더>와 <망명과 자긍심>은 망설이지 않고 꼽았다. 또 다른 하나는 <짐을 끄는 짐승들>이고 또 하나는 <원본 없는 판타지>인데 이 둘 중에 하나만 꼽을 수 없어 네 권을 꼽았다."
그 네 권의 책 중 하나인 '시스터 아웃사이더'의 한 구절은, 이리 배우가 전한 이야기와 연결됐다.
이 사회가 용인한 여성은 테두리 바깥에 있는 우리, 차이의 용광로 안에서 버려진 우리, 가난한 우리, 레즈비언인 우리, 흑인인 우리, 나이 든 우리는, 생존이 학문적 기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누가 눈살을 찌푸리든 손가락질을 하든, 홀로 서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생존은 모두가 잘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를 상상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자들, 즉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아웃사이더들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 '시스터 아웃사이더' 중, 오드리 로드
나는 이리 배우가 현실 구조 바깥에 머물고 있는 소중한 타자들과 연극을 통해 공동선을 구축해 가는 세계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 세계를 어서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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