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있는 최연식 미술감독
권은비
- 한국 사회는 '저출생 시대다,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돌봄노동이 필요한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에서 겪는 문제는 '각자의 몫'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최연식 미술감독은 어떠한가?
"결혼하고 준비된 상태에서 아이를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내도 나도 아이를 낳으면 마냥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아이를 낳으면 옆에 눕혀두고 뜨개질을 한다던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을 상상했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그런 상상은 모두 상상일 뿐이었다. 현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과 맞지 않았다.
누군가는 육아가 힘들다고 하면 '남들 다 하는 건대 징징대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육아와 돌봄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내의 입장에서(여성의 입장에서는) 더욱 힘든 부분이 많다. 나의 힘듦과 아내의 힘듦은 다른 차원에 있다. 아무리 육아를 같이 한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가중되거나 불리한 부분들이 많다. 출산 후 육체적, 정신적 회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 때문에 발생하는 경력 중단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정말 크게 내 삶이 변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나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우리는 어린이집 외에 아이를 돌봐줄 곳이 없다. 급한 상황이 생겨 '아이를 데리고 일을 해볼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돌봄의 시간과 일하는 시간이 겹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어떻게든 아내와 시간을 조율해 해결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가 자신의 일을 양보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 부분에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 요즘은 어떤 것이 가장 즐겁나?
"아이랑 있을 때 가장 즐겁다. 육아가 힘들기도 하지만 목적이 생긴 것 같다. 가족과 아이한테 집중해야지 하는 목적. 가족에게 집중한다. 아내도 나도 부모가 되는 게 처음이다 보니 돌이켜보면 늘 반성하면서 생활한다. 아이라는 존재가 나를 많이 바꿨다."
- 20년 동안 영화미술감독을 한 입장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
"나는 함께 일할 사람을 뽑을 때 면접을 꼭 보는 편이다. 그 사람들의 스펙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아이덴티티를 보려고 한다. 이력서를 보기보다 평범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줄 아는 친구들을 뽑는 편이다.
영화미술은 기본적인 시스템과 기술이 있지만, 순간순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학습된 것보다 다양한 경험 - 여행의 경험, 책을 통한 경험, 아르바이트의 경험 - 등이 쌓여서 발휘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 좋다. 계획이 변경되었을 때 바로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일에는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 미술감독으로서 앞으로 만들고 싶은 세계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장르적 색채가 명확한 영화를 해보고 싶다. 전쟁영화라든지. RETRO SCI-FI(복고풍 공상과학), 공포, 스릴러 같이 이미지가 강렬하게 나올 수 있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그동안 드라마타이즈의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와서 다른 장르는 감상으로만 즐겼던 것 같다.
개인적인 관심은 장르물이지만 아이를 낳고 육아와 관련된 소재가 포함되었거나 아이가 있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도 하고 싶다. 아이가 없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아가가 내 삶에 들어오고 나서 육아와 아이와 관련된 이야기에는 모두 진심으로 몰입이 된다."
최연식 미술감독은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어른이 되서 더 이상 새로운 도전이 꺼려진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른'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같은 길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에게서 스펙을 보지 않고, 경험으로 축적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며 함부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아이와 놀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최연식 미술감독. 그는 내가 최근에 만난 '어른' 중에 가장 재미난 어른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