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쩡허의 무덤난징에 있는 쩡허의 무덤이다. 쩡허는 색목인이라고 부르던 우즈베키스탄 출신 부모를 둔 이슬람계 후손이었다.
이길상
나는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커피가 동아시아 음료 문화인 차와 아랍의 식물인 커피나무가 만남으로써 극적으로 탄생한 음료라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21세기 들어 세계인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커피 문화가 특정한 사람, 국가, 혹은 문명의 독자적 발명품이 아니며 문명 간 대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필자는 십여 년 전에 미국의 세계사 교과서 속에 실린 15세기 중국인 해양 탐험가 쩡허(鄭和 1371~1433)의 남아시아와 동북아프리카 여행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커피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글을 하나 둘 읽게 되면서 떠올랐던 질문이 '혹시 쩡허가 아라비아반도를 방문하였을 때 중국차를 선물하며 차 만드는 모습을 아프리카와 아랍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은 아닐까? 이것을 보고 누군가 차를 만들 듯이 커피나무 잎이나 열매를 볶아서 뜨거운 물로 내리는 방식을 시도해 본 것이 커피를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오래된 상상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최근에 읽게 된 안토니 와일드(Antony Wild)의 책 <커피: 어 다크 히스토리>(Coffee: A Dark History, 2005)에서 바로 나의 생각과 똑같은 주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안토니 와일드는 커피의 기원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차, 차의 발상지인 중국, 그리고 중국과 중동 간 무역의 역사에 주목할 것을 제안하였다. 바로 명나라 초기 환관 쩡허의 북아프리카와 예멘 방문이다.
쩡허는 중국 남부의 윈난성 쿤양에서 마(馬)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산바오(馬 三寶)다. 그의 선조는 부하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무하마드왕의 후예였다. 즉, 쩡허는 중국 한족이 아니고 페르시아계 이슬람교도의 아들이었다. 열한 살이 되던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포로가 되어 명나라로 잡혀 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1398년에서 1402년 사이에 있었던 정변에서 큰 공을 세움으로써 새로 등극한 황제 영락제에 의해 환관 중 최고위직인 태감에 올랐고 쩡(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34세가 되던 1405년 쩡허는 황제의 명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해양 탐험에 나서게 된다. 원나라 세력이 비록 명에 밀려 중국 본토는 포기하였지만 서역으로 가는 내륙의 초원 지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오스만터키의 등장으로 북부의 비단길을 통한 육로 무역의 위험성이 높아진 것이 해상 무역을 시도한 배경이었다. 서양의 대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향신료를 찾아 해양 탐험에 나서게 된 것과 동양 문명을 대표하던 중국이 대규모 해상 무역을 추구한 배경은 동일하였다.
1405년 첫 항해 이후 쩡허는 30년간 총 일곱 차례 대항해를 했다. 한 차례 항해에 보통 2년이 소요되는 긴 항해였다. 동남아시아·인도·아랍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이르는 대단한 여정이었다. 당시 선단은 50~200여 척 규모로 승선 인원이 2~3만 명에 달했다. 일곱 번에 걸쳐 떠났던 인도양 방면 대항해 중에서 다섯 번째였던 1417년 항해와 마지막 항해였던 1432년 항해에서 예멘 지역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