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24 07:19최종 업데이트 21.08.24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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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가 많은 한국 사회. 그중 인권과 헌법에 반하는 사건이 유독 많습니다. 국가권력이 저질렀거나 외면했거나 왜곡한 반인권·반헌법 사건의 피해자를 도우려고 '수상한 흥신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첫 사연은 간첩으로 몰려 감옥에서 죽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박정민씨의 이야기입니다. [기자말]
(앞 글에서 이어집니다.)

1974년 소위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간첩으로 조작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사망한 박석주씨. 우리는 이 사건 재심을 위해서 먼저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나는 당시의 수사 기록과 공판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연행되었거나 조사받았던 당사자들을 찾아내 증언을 듣는 것이었다.


사건 기록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사 공판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검찰이 40여 년 가까이 된 기록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국가보안법 기록은 폐기할 수 없는 영구보존 기록인데도 종종 검찰과 국가기록원 어디에서도 기록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한 적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특히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일수록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적다. 설령 사건 기록을 찾는다 해도 기록의 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검사의 판단에 따라 '국가기밀' 등에 해당하는 서류를 제외하고 당사자의 진술서 등 일부 기록만 받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전체 기록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학교 시절의 아버지 박석주씨. 학내 연대장을 할 만큼 반공정신이 투철했다고 한다. ⓒ 박정민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박정민씨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과거 수사 공판 기록이라 하면 이런 기록을 말하는 건가요?"

그가 내민 휴대전화에는 보안사 수사 기록과 검찰 기록을 하나하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빼곡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박정민씨는 2007년도에 아버지 사건을 들여다보고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보고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민원실을 찾았다고 한다.

"전부터 아버지 한을 풀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앙지검을 찾아갔더니 자료를 내주기는 하는데 저더러 복사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곳에 있던 복사기 두 대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어서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휴대전화로 찍어도 된다고 해서 기록을 한 장 한 장 찍었죠."

그렇게 그는 수천여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한 장 한 장 사진으로 담았다. 그의 수고 덕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당시 연행되었거나 조사받았던 당사자들을 찾는 일이 남았다. 수사기관에서 받은 수사과정을 증언해줄 증인들이다. 수사 기록에는 고문을 했다거나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당시 조사를 받거나 재판을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우리는 당시 피해자 중 생존해 있는 분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문제의 기차 시간표
 

일본 철도박물관에서 온 회신. 우에노를 오전에 출발해 그날 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판결문의 내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회신문에 따르면 24시간이 넘게 걸린다. ⓒ 변상철

 
나는 일본의 재일교포 조작간첩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를 통해 진두현(박석주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서 재일교포 간첩으로 몰려 구속)씨나 그의 가족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박정민씨는 당시 국내에서 검거되었던 분들 중에 생존자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일본의 '재일 한국 양심수 동우회' 등의 단체를 통해 수소문한 결과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진두현씨의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진두현씨 아내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통혁당 재건위' 사건 진행 상황과 재심 취지를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진두현씨는 몇 해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2017년 5월 우리는 그의 가족을 만나 사건 실체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고 도쿄로 출발했다. 도쿄의 한 카페에서 만난 진씨의 아내는 모든 것이 조작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진씨가 북한에 다녀왔다는 것이 말이 안 맞는다고 했다. 진씨 아내는 당시 기차 시간표를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기차를 타고 니가타로 가 어선에 탑승해 북한에 다녀왔다는 그 시간에 진씨는 일본에 분명히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일본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증명해준 일본인의 진술서가 당시 재판부에 제출되었는데도 무시당했다고 한다. 기차 시간 역시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다음날 일본의 사이타마(埼玉)현에 있는 철도박물관으로 향했다.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에 있는 오오미야(大宮) 철도박물관에는 철도와 관련한 각종 문서가 보존되어 있는 철도도서관이 있다. 우리는 도서관 담당자에게 사건 공소장에 기재된 철도 이동 시간대에 이동이 가능한지 알고 싶다고 했다. 담당자는 알고 싶은 해당 연도와 월 그리고 출발지와 도착지를 알려주면 확인해서 회신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정식 공문을 접수해 1965년 2월, 1968년 4월, 1972년 11월 우에노(上野)로부터 아키타(秋田)를 거치는 기차의 경유 시간을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담당자는 곧바로 회신을 해 공소장에 기록된 철도 시각이 실제 운행 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당시 이동 가능한 시간표를 보내주었다. 그 표에 의하면 과거 보안사의 수사 기록과 공소장 그리고 판결문에 나온 열차 시각은 조작됐다. 진씨 아내가 주장한 대로 북한에 다녀왔다는 시간에 진씨는 일본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사건의 실체 일부가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확보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때 한국의 박정민씨에게서도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부친 박석주씨와 함께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에 근무하다 통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갔던 동료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네가 박석주의 아들이냐
  

통일혁명당 재건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이동현씨 ⓒ 이희훈

 
박정민씨가 찾아냈다는 사람은 과거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에서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다 보안사에 연행된 이동현씨였다. 이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뒤 충북 충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동현씨의 주소지만 알 뿐 전화번호나 다른 연락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박정민씨와 일정을 조율해 2017년 10월 우리는 함께 충북 충주로 향했다. 충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산비탈에서 이동현씨의 집을 찾았다. 집에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나오셨다. 누구냐는 질문에 박정민씨는 예전 아버지의 회사 동료였던 이동현씨를 뵈러 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반가워하면서 이동현씨는 잠시 시내에 나갔다고 했다. 우리는 알겠다고 하고는 혹시 할머니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집을 나와 마을 입구 길가에서 이동현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워낙 인가가 없는 지역이라 우리는 그 차가 이동현씨 차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상대로 차는 조금 전 우리가 들른 그 집 앞에 멈췄다. 우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이동현씨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서자 이동현씨는 놀라는 눈빛이었다. 누구냐는 질문에 박정민씨는 박석주를 아느냐고 물었다.

"누군데 박석주를 안다는 겁니까?"

박정민씨는 자신이 박석주의 아들 박정민이라고 했다. 이동현씨는 잠시 얼음처럼 굳어 있다가 박정민씨의 손을 잡으며 '네가 박석주의 아들이냐'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동현씨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자며 근처 식당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자리에 앉자 이동현씨가 여긴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었고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박석주씨가 교도소에서 사망했다고 하자 그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나도 그 사건 이후로 고향 강화도에 가서 있다가 롯데제과에서 몇 개월 근무했지만 거기서도 신원조회 걸려서 잘리고, 포항제철에 입사했지만 거기서도 신원조회가 걸려서 1년도 근무 못하고 쫓겨나고, 제대로 살지를 못했어."

박정민씨는 재심을 위해 아버지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줄 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이동현씨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사람이 무슨 간첩이냐고. 우리는 회사에서 만들라는 기계 만든 것밖에 없어. 북한보다 더 성능 좋은 무기를 생산한다고 유탄발사기를 만들어서 대통령도 시험발사에 와서 격려까지 했는데, 나중에 우리가 그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고? 기가 차서. 그렇게 억울하게 잡혔다가 감옥에서 죽었다니 기가 막혀서 뭐라고 할 말이 없네."

그는 박정민씨가 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고 말하자 무조건 돕겠다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이동현씨에게 그동안 왜 재심을 신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동현씨는 자신도 지금껏 살면서 억울한 시간을 보냈으나 재심을 해도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아 그냥 덮어두고 살자는 생각으로 조용히 지냈다고 했다.

"어렵게 한라시멘트에 들어가서 노조 활동을 한 적이 있어. 그런데 강원도경(지금의 강원경찰청)에서 내 조회 경력을 몰래 회사에 퍼뜨린 거야. 빨갱이 새끼가 노조 활동 한다고 난리가 났지. 결국 노조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조용히 나왔지. 그렇게 살았어."

박정민씨는 더 이상 그렇게 물러서지 말자고 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숨어 지내야 하느냐고, 함께 진실을 밝혀서 떳떳하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국가에 제발 그따위 더러운 짓 더는 하지 말라고 경고라도 해야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 박정민씨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난 이동현씨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온 옛 동료의 아들 손을 잡았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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