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자전거를 탈 때의 모습. 그는 이 시절의 기억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박정민
두 사람은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야 했다. 학교는 정부기관의 지원을 받아 다녔고, 쌀은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정부미를 배급받았으며, 반찬거리는 근처 교회에서 주는 반찬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매달 감당해야 하는 월세와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초등학생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집 근처 신문사에 가서 신문배달 일을 알아봤어요. 물론 처음에는 너무 어리다고 안 된다고 하는 걸 매달리다시피 해서 일을 했죠. 학교 끝난 후에 신문배달하며 생활비를 조금씩 벌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올라가면서부터 신문사 방 한 칸을 얻어서 살기 시작했죠. 신문사 사장님이 제 사정을 보고 숙식을 제공해 주신 거죠. 제가 배달한 신문이 조간신문이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배달을 해야 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일을 했죠. 지금도 스스로 돈을 벌고 학교를 다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생계를 위해 곧바로 취업을 했다. 그리고 21살 되던 해에 입영통지서가 나와 입대했다. 다행히 그는 원하던 공군에 입대했다. 육군보다는 조금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그곳에서 대학입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하자마자 2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2년제 대학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어머니가 등록금을 지원해주시겠다고 해서였어요. 합격 통지를 받고 나서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지요. 대학에 합격했으니 등록금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어머니와의 전화통화에서 어머니가 입학하면 등록금을 도와주겠다고 했던 그 말만 믿었던 거죠. 그런데 끝내 어머니에게 등록금을 받지 못해 등록을 못했어요. 등록을 포기하고 다시 돈을 벌면서 대학시험을 준비했고, 다음 해에 4년제 대학에 들어갔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 벌어서 다녔죠."
친척들 만나 아버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대학을 다니던 중 아버지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체국에 다니셨던 작은 아버지가 그를 찾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불가능하지만 예전에는 우체국에서 신원조회가 가능했던 모양이다.
"작은 아버지 연락을 받고, 전주역에 내려서 근처 식당으로 갔는데 거기서 수십 명의 친척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날 식당을 통째로 빌리셨더라고요. 그 많은 친척들이 다 저를 반겨주는데 정신이 얼떨떨하더라고요. 다 같이 모여 같이 밥 먹으며 잔치를 했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느낌을 받았죠. 친가 친척들 만나면서 아버지 일도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무슨 일로 교도소로 가셨고, 어떻게 돌아가시게 됐는지 알게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 산소도 찾아가게 되었죠."
전주에서 아버지 친척을 모두 만나면서 아버지가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고, 복역 중 사망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으로 혈연이라는 '공동체'로부터 따스함과 동질감을 느꼈다고 한다. 친가 친척들은 정민씨 남매를 못 찾아서 못 돌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까지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결혼을 앞두고 집안의 국가보안법 전력과 그로 인해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하다 보니 처가 부모님이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하셨던 거다.
"처음에 처가에 찾아갔을 때 미움을 좀 받았죠. 결혼식 앞둔 사위가 집안도 별로지, 부모님도 안 계시지, 달랑 누나 하나 있는 고아나 다름없는 그런 집안 사람인데 집안 사정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지... 이러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물론 대놓고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결혼하고 나서도 저에게 싫은 소리를 좀 하시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누나도 결혼을 어렵게 했죠. 누나는 성격 자체가 폐쇄적인 데다가 부모 없이 자란 것과 다름없는 형편없는 집안에 가난한 집이니 시가 쪽에서 좋게 여길 리가 없죠. 하여튼 우리 두 남매가 결혼은 좀 어렵게 했어요."
부친의 간첩 경력 때문에 살면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결혼 외에도 어디 한 두 가지였겠나. 학교생활부터 취업까지 다양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부모님이 안 계시니 학교에 가기 싫더라고요. 학교에 가더라도 제 스스로 예민하다 보니 작은 일에도 친구들과 다툼이 잦았어요. 자격지심에 빠져 친구들과도 자주 다퉜던 것 같아요. 학교를 나가다 말다 하면서 생활했으니 학교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죠. 딱 한번 아버지 경력 때문에 차별이랄까, 영향을 받은 적이 있어요. 군대생활 할 때였는데, 공항관리대라는 곳에 지원을 해서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곧바로 탈락으로 변경되는 거예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버지 영향 때문이었다 싶더라고요. 공항관리대는 대통령 전용기도 관리하는 중요한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 뉴스 같은 곳에서 간첩 이야기나 간첩 사건이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해요."
간첩의 굴레, 저 하나로 끝내고 싶어요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박석주씨가 쓴 편지.
박정민
간첩으로 조작돼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다가 출소를 몇 달 앞두고 동료 재소자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대학을 다닐 때 쯤에야 알게 된 과거 아버지의 일에 대해 이제 와서 재심을 하려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예전부터 꾸준히 재심을 하려고 했어요. 사실 2007년도부터 재심을 준비 했었죠. 아버지하고 함께 잡혀갔던 분들을 찾아다녔는데 그때 그분들이 하나같이 재심은 힘들 거라는 말을 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재심을 해보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자료를 모아 재심을 준비했지만 정작 재심을 맡겠다는 변호사가 없어서 결국 포기했었죠.
그런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니 마음이 바뀌더라고요. 제가 간첩의 아들이면 제 자식들, 손자들도 모두 간첩의 아이들이 되는 셈이잖아요. 겪어보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제가 이미 한번 겪어봤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간첩의 굴레와 고통은 저 하나로 끝내고 싶어요. 그래서 다시 재심을 결심했어요. 재심이 어떻게 될지 결과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고 시작했어요. 어려운 것도 알죠. 그래도 살면서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새로 시작하는 가족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박정민씨가 재심을 하려는 이유였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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