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KBS
친위 쿠데타와 시해 계획
열세 살에 가업을 물려받은 인종은 '왕씨 고려'가 아닌 '이씨 고려'처럼 국가가 운영되는 상황을 묵과하지 않았다. 17세 때인 1126년, 그는 이자겸을 겨냥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기편 무장들을 규합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자겸의 역공으로 친위 쿠데타는 실패했고, 척준경의 방화로 궁궐이 불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코너로 내몰린 인종은 고려왕조의 간판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급급했던 그는 왕권을 넘긴다는 조서를 전달했다. 경원 이씨에게 왕권을 이양하면, 왕씨 나라가 망하고 이씨 나라가 설 수밖에 없었다. 건국 208년 만에 왕조의 간판이 내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면서도 다소 색다른 <고려사절요>의 인종 편에 따르면, 이자겸은 왕위 등극을 거부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씨 왕조인 당나라(618~907)의 건국을 합리화했던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을 신봉했다. 십(十)과 팔(八)과 자(子)가 성에 들어간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겸은 뜻을 접고 말았다. 육촌동생 이수(李壽)가 공식 석상에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며 호통을 쳐대는 바람에 중신들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십팔자(十八子)가 위왕(爲王)을 포기하자, 이번에는 인종이 꿈틀댔다. 인종은 제2차 친위 쿠데타를 기획했다.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는 했지만, '이씨의 나라'가 언제 또다시 돌출할지 알 수 없었다. 17세의 군주는 그 위험성을 제거하고자 또 다른 거사에 착수했다.
제1차 때보다 인종은 더 신중했다. 이자겸과 군부의 연대를 차단하고자 척준경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군부를 장악하기는 했지만 이자겸보다 위상이 낮은 척준경의 경쟁심을 자극해 두 사람의 동맹에 흠집을 내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이자겸은 군주 시해 계획을 세웠다. 그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인종에게 독이 든 떡을 선물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로 인해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인종의 첩이 된 그의 넷째 딸이 아버지와 남편의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이로 인해 이 대결은 이자겸이 예측하지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고려사> '폐비 이씨 열전'에 따르면, 아버지의 독살 음모를 알게 된 넷째 딸은 인종에게 이 사실을 귀띔했다. 아버지가 아닌 남편을 선택한 것이다. 덕분에 인종은 독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인종은 이자겸이 보내준 떡을 까마귀에게 던졌다. 떡을 먹은 까마귀는 더 이상 날지 못했다.
넷째 딸의 '배신', 아니 '선택'을 눈치 채지 못한 이자겸은 그 딸을 제2차 암살 작전에 이용하고자 했다. 넷째 딸에게 독 사발을 주면서 인종에게 먹일 것을 지시한 것이다.
고려시대만 해도 데릴사위제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은 이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군주의 결혼에서는 데릴사위제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 시집가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출가외인이란 표현이 적용될 수 있었다.
넷째 딸은 '출가외인'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와 가문의 이해관계를 무시한 그는 예전에는 조카였지만 지금은 남편이 된 인종을 선택했다. 약사발을 들고 인종에게 다가가던 그는 그 앞에서 일부러 넘어졌다. 넷째 딸이 복병이 되어 이자겸의 계획을 무산시킨 것이다.
암살 계획이 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겸은 병력을 동원해 궁궐로 달려갔다. 하지만, 또 다른 복병의 출현을 보게 된다. 척준경의 군대가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외손자 겸 사위를 억누르고 이씨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이자겸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로써 17세의 인종은 왕씨 고려를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듬해에 그는 이자겸과 함께한 죄를 물어 척준경까지 유배를 보냈다.
한편, 인종과 이자겸의 대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넷째 딸은 셋째 딸과 함께 폐위됐다. 국정의 잘잘못을 간쟁하는 간관(諫官)들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넷째 딸에 관한 기록이 '폐비 이씨 열전'이란 제목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종은 폐비가 된 그를 박대하지 않았다. 인종의 두 아들인 의종과 명종도 그랬다. '폐비 이씨 열전'은 이렇게 전한다.
"자겸이 실패한 뒤에 간관들의 말에 따라 폐위시켰다. 왕은 사발을 엎은 공로를 생각해서 토지와 집과 노비를 하사하고 매우 각별하게 은혜를 베풀고 돌봐줬다. 의종·명종 두 임금 역시 삼가는 마음으로 섬겼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