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에 의하지 않은 가족 관계가 영국 사회에 거부감 없이 확산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변화는 언제 어떤 수순을 밟아 제도화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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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두 살 미만의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온 노신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이 계속 싸우기에 손자들이 활동적이라 힘드시겠다고 했더니, 손자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하셨다. 아차 싶었다. 아주 늦은 막둥이? 혼외 자식? 나는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냥 웃어 넘겨야 할지 판단을 못 내리던 중이었고, 내 얼굴에서 난감함을 읽었는지 이해한다며 웃으셨다. 두 아이는 입양한 아이였다. 그 분의 아이들은 이미 다 장성해서 독립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입양해 사회에 작은 기여라도 하자는 아내의 제안에 동의해서 두 명을 동시 입양했다고 했다. 하지만, 두 아이가 사이좋게 지내질 못하고 많이 싸운다고 하셨다. 노년의 입양, 노년에 만든 새로운 가족… 여운이 오래 갔다.
놀이 모임엔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가 오기도 했고, 어떨 때는 가족이 단체로 오기도 했다. 영국도 99% 여자들 속에서 남자 홀로 어울리기는 힘든지 아빠들은 주로 조용히 있는데, 예외가 있었다. 6-7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오는 아빠로, 대단히 사교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 아이는 다음 주엔 다른 남자와 왔다. 역시 열성적으로 아이들 놀이에 참여하고 스스럼없이 섞였다. 두 사람이 그 아이를 번갈아 데리고 왔고, 나는 아마도 친부와 양부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았고 놀이 모임에서 그 둘을 지칭하던 "두 아빠 (two daddies)"가 친-양부가 아닌, 동성 커플의 입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놀이 모임을 통해 나는 결혼에 의하지 않은 가족 관계가 영국 사회에 거부감 없이 확산되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변화는 언제 어떤 수순을 밟아 제도화된 것일까?
변화의 시작, 2002년 입양과 아동에 관한 법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금지된 2003년부터 동성 결혼법이 통과한 2013년까지 21세기 첫 10년, 영국은 성소수자 정책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보였다. 시작은 2002년 '입양과 아동에 관한 법(Adoption and Children Act 2002)'이었다.
기존에 적용되던 입양법(1989)이 가진 문제로 두 가지가 지적되었다. 하나는 아동 복지 영역으로, 개정안은 입양되는 가정의 환경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과정과 또 입양 아동이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나이인 경우 아동의 의견도 물어보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입양인 자격에 대한 문제였다. 당시 현행법은 "성인 어른 혹은 결혼한 부부"에게만 입양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입양희망자가 부족해서 아동들이 입양 기관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고 또 아예 입양되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에 자격을 완화할 목적으로 "결혼한 부부"에서 "결혼한"을 생략했다. "결혼"의 생략은 비결혼으로 맺어진 커플의 입양을 허가하는 것으로서, 동거 커플과 동성 커플을 의미했다.
당시 동성애자 권리(gay right)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단계라 웨스트민스터에서의 논쟁은 동거 커플보다는 동성 커플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법안의 초점은 동성애가 아닌 아동이었다. 지지하는 쪽은 초점을 아동에게 맞추고 가급적 많은 아동에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과연 동성 커플이 아동에게 안정성을 줄 수 있느냐라는 반론이 있었지만, 이 법안은 통과되었다.
동등한 입양권 획득을 계기로 성소수자에 대한 개혁 정책은 속도가 붙었다. 다음 해인 2003년, 블레어 내각은 '성적 지향에 따른 고용차별 금지법(Employment Equality (Sexual Orientation) Regulations 2003)'을 상정, 통과시켰다. 계급·인종·인권·여성을 이슈로 내세운 1960년대 뉴레프트(New Left) 운동 이후, 영국은 차별 금지법을 분야별로 입안했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는 인종 차별 금지(1965), 임금 차별 금지(1970), 장애인 차별 금지(1995)에 비해 상당히 늦은 셈이었다. 약 40년간 각각 따로 입안된 법들은 2010년 평등법(Equality Act 2010)의 이름으로 통합된다. 2021년 5월 국민 청원이 들어가는 한국의 차별 금지법과 흡사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