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궐 경호부대의 수문장 교대 의식. 사진은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열린 의식.
김종성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진 데다가 세조에 대한 반감이 큰 지역이고, 거기다가 유력 토호가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시애는 함길도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남도의 군대가 함길도를 다 죽이려 한다'라는 이시애 진영의 선전전도 지역 여론에 불을 질렀다. 토착 유지들의 행정 자문기구인 각 고을 유향소도 그에게 호응했다. 위의 김상오 논문 하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시애 난에 호응한 자들은 전부 함경도민이며 각 고을의 유향소 품관들과 이시애의 일가 친족들이 중심이 되어 중앙 정부군에 반항하였으며, 관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가한 수도 수만 명이 되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세등등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반란군의 기세보다 중앙군의 기세가 더 셌다. 이때 중앙군에는 유명한 남이 장군도 있었다. 세조가 강하게 육성한 중앙군의 힘을 반란군은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시애는 양력 6월 11일 일어나 9월 10일 체포됐다. 3개월도 못 채운 것이다. 이시애를 체포해 관군에 넘기는 데 가담한 사람도 그의 처조카였다. 이래저래 이시애의 위신은 깎일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는 자기를 응원하는 세력의 기세만 살폈다. 가문이 함길도에서 3대째 권세를 누렸고, 동향 토착세력이 세조에게 반감을 갖고 있으므로 자기에게 승산이 있다고 봤다. 이 점 역시 심문 도중 그의 입에서 나왔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모친상 때부터 역모가 시작됐다'라고 답한 뒤 이시애는 또 한 번 매를 맞았다. 그런 다음 이런 진술이 나왔다.
이 도(道)를 근거지로 수년간 병력을 축적한 뒤 경사(京師, 수도)를 곧바로 치고자 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수년'은 흔히 2, 3년이었다. 반란을 일으켜 함길도에서 세력을 구축한 뒤 수년 내에 한양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국운 팽창 간과
이 진술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시애가 조선사회의 흐름이나 한양 정권의 기운을 충분히 살피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조 정권은 단종 폐위로 정통성에 하자를 안게 됐지만, 이 정권하에서 조선의 국세는 팽창했다. 중앙정부도 세졌고, 중앙군도 강해졌다.
이 시대에 국운이 상승했다는 점은 이시애가 진압된 이듬해인 1468년에 세조가 13년의 재위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 세조의 아버지에게 세종(世宗)이란 묘호가 부여됐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 세(世)란 묘호(사당 내의 칭호)가 부여되는 게 곤란한데도 그에게 '세'란 글자가 부여됐을 뿐 아니라 세종보다 높은 세조로 결정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망이 멸망시킨 한나라(전한)를 부활시켜 후한을 세운 황제 광무제가 죽은 뒤 세조로 불린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세조란 묘호는 창업의 기틀을 세웠거나 그에 준하는 공적을 남긴 군주에게 부여됐다.
수양대군에게 이 묘호가 부여될 때 조정 내에 이견이 있었다. 세종에게 이미 '세'가 부여됐는데 어떻게 세조란 묘호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이견을 무시하고 세조 묘호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세조의 객관적 업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대에 왕조가 튼튼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시애는 세조 시대의 그 같은 상승 기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기를 응원하는 '함길도 공화국'의 '후배들'만 믿었을 수도 있다. 아군의 기세만 살피고 적군의 기세는 살피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수년 내에 한양 정권을 무너트릴 목표를 세웠을 수도 있다. 관직을 내던지고 대권을 잡고자 거병했지만 3개월도 채우지 못한 것은 그가 라이벌 진영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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