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의 '네이팜 소녀'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평가되는 '네이팜 소녀'의 사진
AP=연합뉴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 거점 도시 다낭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퐁니·퐁넛 마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 청룡부대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응우옌 티 탄(여)은 당시 8살이었다.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이모, 사촌동생 그리고 남매들과 함께 방공호로 향했다. 그때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한국군은 수류탄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방공호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위협적인 그들의 태도에 이모는 방공호에서 나가자고 말했다.
한국군은 방공호에서 나오는 가족에게 총을 쐈다. 응우옌 티 탄의 오빠는 대나무 숲으로 도망가다가 엉덩이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언니는 뒷방으로 내려가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동생은 입에 총을 맞아 숨을 쉴 때마다 피를 토했다. 그렇게 퐁니·퐁넛 마을 주민 70여 명이 희생됐다.
열흘 후 마찬가지로 다낭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하미 마을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팜 티호아(여)는 자식들에게 먹일 쌀을 사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시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군이 총구를 들이대며 무력으로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지휘관이 나타나 장황한 연설을 마치자 별안간 수풀 속에 숨어있던 기관총에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팜 티호아는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고는 땅에 엎드렸다. 첫 번째 수류탄은 허리를 맞고 튕겨나갔지만, 두 번째 수류탄은 발밑에서 터져 두 발목이 잘려 나갔다. 이날 팜 티호아에게 일어난 비극은 두 발목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었다.
청룡부대로 확인된 한국군은 마을에서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는 인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확인 사살을 위해 집을 불태웠다. 이날 두 발목을 잃은 어머니 팜 티호아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마찬가지로 한국군이 죽인 다섯 살배기 딸과 열 살짜리 아들의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총소리가 멈춘 이튿날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을 찾아 땅을 팠고, 잔해를 주워 담았다. 군인들이 아직 철수하지 않아 누구든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상황에 무덤을 만들 수는 없었다. 도랑에서 흙더미를 파낸 뒤 어렵사리 수습한 시신의 잔해를 그곳에 대충 묻고 향을 피웠다. 그러나 한국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도저로 현장을 깔아뭉갰다. 시체는 훼손되고 햇빛에 말라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미 마을에서만 140여 명이 사망했다.
왜 이런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을까. 청룡부대 1중대 소대장들의 증언에 따르면 1968년 2월 12일 아침 부대는 퐁니·퐁넛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병사 한 명이 총에 맞았다. 북베트남군의 저격으로 의심해 한국군은 마을을 수색했다. 마을을 뒤졌지만 총을 쐈을 만한 젊은 남자를 찾지 못했다. 마을 청년들이 이런 상황을 예상해 한국군이 작전하는 지역에서 미리 피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노인과 여자, 아이들뿐이었다. 이어 학살이 일어났다.
하미 마을의 학살 역시 분명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군이 두려워 도망치는 베트남 민간인들을 보고 '도주'하는 광경에 무조건 사격을 가했을 수 있다. 비전투원을 전투원으로 혼동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같은 부대원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에 흥분해 이성을 잃은 한국군이 보복 차원에서 만행을 저질렀을 수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진실은 학살 관련자들의 고백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겠지만 과연 관련자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죽기 전에 입을 여는 일이 가능할까. 2020년 10월 7일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2인이 진실을 밝혀달라며 유엔에 진정서를 냈다.
오렌지 색깔 띠 두른 드럼통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베트남 자연 생태계가 초토화 되었다. 사진은 전쟁박물관에서 촬영.
김성헌
황선길은 베트남 파병 기간에 미군으로부터 받았다는 오렌지 색깔의 띠를 두른 드럼통을 보았다. 이 안에는 '고엽제'라고 불리는 화학 물질이 들어있고, 이름 그대로 나뭇잎의 성장을 억제해 고사하는 데 사용한다고 했다. 그밖에 고엽제 사용에 관한 별다른 지시나 주의사항은 없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고엽제를 뿌리면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덥고 습한 날씨에 모기까지 못살게 구는 터라 미군이 고엽제 살포를 중지한 1971년까지 한국군 파월 병사들은 비행기를 쫓아다니면서 살포되는 고엽제를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뭇잎에 허옇게 묻은 가루를 손에 묻혀 약을 바르듯 팔과 다리에 발랐다. 제초 작업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고엽제 가루를 철모에 담아서 맨손으로 뿌리기도 했다.
선길은 여러 정글에서 8개월여 전투에 참가하다 1973년 2월 부대 철수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군에 남아 부사관으로 근무한 선길은 78년에 처음 나타난 사지의 근육 경련이 심해지자 85년 13년여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인 전남 영광군 군남면 월홍리로 내려가 퇴직금과 저축 등 2000만 원으로 한우와 돼지 등을 키웠다. 그러나 전역한 후에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87년 봄엔 몸의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질 정도로 병세가 악화했다.
미국에서 고엽제 후유증을 겪는 일부 환자들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 회사를 대상으로 대규모 소송을 제기했고 의회에서는 청문회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선길은 얼핏 들었다. 고엽제 후유증? 그때까지도 선길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1984년 <중앙일보>가 고엽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65년부터 70년 사이 월남을 방문한 사람은 목이 달아난 장승처럼 잎 하나 없이 서 있는 야자수의 처절한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베트콩의 잠복처를 없애기 위해 미국 공군기들이 뿌린 고엽제의 결과였다. 미군은 이 기간 중에 무려 1천2백만 갤런의 '오린지제'라는 이름의 이 고엽제를 월남의 작전 지역 촌락과 도로 주위에 뿌렸다. 그러다가 70년 4월 17일 미국 정부는 갑자기 오린지제의 살포를 중지했다. 이 고엽제 속에든 디옥신이란 독물에 접한 동물이 기형 새끼를 낳았음이 실험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후속 기사는 없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중앙일보>에 압력을 가했다. 기자를 해고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른 언론사들이 고엽제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그는 89년 8월 전남대병원을 찾아가 조직검사를 했으나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자 가축과 전답을 모두 팔아 서울 구로동 고려대 부속 구로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런 차도 없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뇌 변성'이란 병명만 확인했을 뿐이다.
선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짜리 지하 셋방 그리고 절망뿐이었다. 누군가는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고약한 성병에 걸린 것이라며 선길을 비난했다. 1992년 7월 11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월남전 참전 병사 중 조현병 증세나 전상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은 그때까지 18명이었으나 고엽제 후유증을 비관해 자살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2020년 9월 기준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로 인한 질병을 겪고 있는 이는 13만 8747명이다. 또한 161명의 2세 환자가 있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에 북베트남군이 숨거나 무기 수송로로 이용하는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또 북베트남이 경작하는 농작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엽제를 이용했다. 1960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에 해당하는 60만 에이커의 광범위한 지역에 2000만 갤런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그중 80%의 해당하는 1600만 갤런의 고엽제가 한국군 작전지역에 무차별 살포되었다.
보훈처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자살한 사람들을 외면했다. 죽음의 1차 원인이 자살인 이상 그 인과 관계를 확장하여 고엽제 후유증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반면 법원은 "고엽제 후유증이 망인으로 하여금 자살을 결심하게 한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그밖에 다른 자살의 동기를 찾아볼 수 없다면 사망 원인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봄이 상당하다"라며 보훈처의 조처가 위법하다고 2014년 9월 30일 판결했다.
전쟁의 끝 그리고 남겨진 것

▲월남전 전몰 장병 합동 위령제
영화 <기억의 전쟁> 스틸컷
베트남 전쟁에 동원된 한국군 청년도, 한국군에 의해 죽은 베트남 청년도 결국 피해자이다. 누군가는 분명 그 죽음에 책임이 있을 텐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누가 이득을 보았을까. 베트남 전쟁 특수로 성장한 한진 같은 재벌과 국가였다. 청년의 핏값으로 일군 재산이 형제 싸움, 남매 싸움 등 대를 이은 분쟁을 거치며 후손에게 승계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경제 개발을 위한 대규모 자금을 유치한 것은 한국 현대사의 수치스러운 장면 중 하나다. 한국군의 2차 파병 이후에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박 정권은 청년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에 나섰다. 물론 그 전에 경제적 동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명분을 앞세웠던 것과 달리 한국 정부는 군대를 더 보내는 대신 상응하는 경제적 혜택을 달라고 미국에 노골적으로 거래를 제안한다.
이에 따라 1966년 3월 체결된 브라운 각서에 의하면 한국은 5만 명을 상한선으로 하여 베트남에 군사를 파견한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국군의 현대화 계획을 위한 장비를 제공하고, 한국 기업으로 하여금 베트남 전쟁에 쓰이는 군수물자의 일부를 납품하게 했으며,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과 수출을 지원하고 한국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을 제공했다.
제국주의 전쟁에 자국 병사를 용병으로 보내 돈벌이를 하고, 청년의 죽음으로 유입된 자본이 재벌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은 분명 매우 부도덕하고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전쟁으로 피해를 본 청년들은 이역 땅에서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해 적대할 이유가 없는 베트남군을 살상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죽거나 다쳤으며 귀국 후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더구나 책임의 화살을 온전히 자신에게 돌려야 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투철한 애국심, 이데올로기적 사명감, 영웅주의 따위의 이유를 두고 싸우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생존'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라는 폭력적인 편 가르기 아래에서 죽여야 했고 죽어야 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파병했다.
글
- 황경서: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중이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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