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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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속에서도 전두환은 정승화와 친해지려고 시도했다. 수사 중 취득한 청와대 금고 9억 원 중 1억은 합수부 수사비로 남겨두고 6억은 박근혜에게 준 뒤 나머지 2억을 '총장님 쓰시라'며 정승화에게 들고 간 것이다. 당황한 정승화는 돈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비서실장을 통해 은행에 예치했다. 전두환이 선심을 썼지만, 정승화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밀어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인사 조치로 전두환을 꺾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인 12월 12일 밤 '전두환 군대'가 한남동에 들이닥쳤고, 정승화는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겪게 됐다.
그가 수모를 당한 것은 권력을 향한 전두환의 움직임이 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전두환의 거사를 사전에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전두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두환이 그런 일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쿠데타군에 끌려간 뒤에도 자신이 쿠데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두환 때문에 자신이 끌려왔으리라고는, 지금쯤 전두환이 실질적 1인자가 돼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수감돼 있는 동안 김재규가 없는 말을 지어내 자신을 모함한 게 아닐까, 전두환이 수사 실적을 세우려고 최규하에게 허위 보고를 한 게 아닐까, 최규하가 뭔가 오해하는 게 아닐까 등등의 생각을 했을 뿐이다. 회고록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그는 붙들려 있는 동안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처음엔 나도 모르는 사실을, 김재규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나를 끌고 들어가는 어떠한 공모 주장을 하기 때문에 합수본부 측에서 이를 근거로 최 대통령에게 은밀히 보고한 뒤 조사 재가를 받아 저희들 공로로 만들기 위해 수단을 안 가리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노재현 국방장관이 손을 놓고 방관할 리는 없을 터이니 곧 사실이 밝혀지겠지 하고 생각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데는 정승화의 낙관적 시국관도 작용했다. 쿠데타 같은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 참모총장인 자신의 위상에 대한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군의 순수성과 애국심을 믿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도전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던 터였다. 내가 부하들에 의해서 체포·구금된다는 것은 더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군인의 순수성,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내가 원하지 않는 한(은) 군이 정권에 도전하는 쿠데타가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과 18년 전에 쿠데타 성공 사례가 있었고 그 뒤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고 자신도 5·16에 힘입어 승승장구했지만, 정승화는 자기 밑의 전두환이 자신을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한 데는 전두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업신여김'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2억 원을 들고 온 전두환을 '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 정도로 이해했다.
그는 "나로서는 이러한 것을 바로잡도록 교육하는 것도 군인 생활의 주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전두환을 도덕적으로 바로잡을 대상 정도로 가벼이 생각한 것이다. 다른 금고도 아니고 상관의 금고를 건드린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밤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발생한 총격전을 다룬 13일자 동아일보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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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업신여겼다가
정승화가 전두환을 소홀히 대한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작용했다. 계엄사령관인 그는 전두환 같은 소장파 장군들보다는 정치권의 3김씨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정승화는 유신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그는 1979년 11월 24일 육군 지휘관 회의 때도 '박 대통령 서거로 유신의 존립 근거는 없어졌으니 이제는 문제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유신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가 가진 또 다른 소신은 '3김씨 역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김에다가 김종필까지 더해 3김이 향후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회고록에서 정승화는 '김대중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그가 국민 앞에 내세우는 이상은 그럴 듯했지만, 실제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에 따르면, 1979년 11월 26일에는 언론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김대중은 사상이 불투명하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김대중에 대한 기사 쓰기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계엄사령관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영역에 사실상 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승화는 크게 보면 아군인 김종필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었다. 김종필은 육사 8기였다. 박정희는 이들 8기를 이용해 5기를 견제하고, 11기 이하를 이용해 8기를 견제했다. 그래서 5기와 8기 사이에는 마음의 거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정승화는 박정희가 김종필을 소외시키는 것을 보면서 승승장구했다. 박 정권 내에서 정승화가 차지한 기반은 김종필에 대한 견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승화의 눈에는 양김(김대중·김영삼)이 아닌 3김이(김대중·김영삼·김종필) 다 불편한 존재였다.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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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는 '유신을 극복하되 3김은 안 된다'는 정세 인식을 갖고 10·26 이후에 대처했다.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자신에 대한 군부의 도전이 없을 거라 기대한 그는 3김 견제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법리에도 둔하고 탐욕스럽고 주제넘은' 전두환 같은 '소인배'가 들어올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 소인배는 도덕적으로 바로잡거나 인사 조치로 내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소인배 같은 전두환보다는 지도자급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움직임이 정승화에게 더 중요했다는 점은, 전두환이 옛 주군의 금고를 훔치는 선에 머물지 않고 아예 세상을 통째로 훔칠 가능성에 대해 정승화가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정승화는 3김을 라이벌로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진짜 라이벌은 3김이 아니라 1전(全)이었다. 라이벌을 잘못 설정한 것이 정승화의 파국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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