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30일 128명의 간호사 독일 파견 환송식
국가기록원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간호사들도 적잖은 고초를 겪는다. 파독 간호사들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혹은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낯선 나라로 떠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당시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고학력 여성이었다. 대부분 중등학교까지는 마친 20대 여성이었으며 대학교육을 받은 여성이 많았다. 중등교육을 마친 여성은 간호조무사를, 고등교육을 마친 여성은 간호사를 선호했다.
독일에서 간호 일은 한국과 달랐다. 독일 간호사는 주로 병실 청소, 환자 용변 돕기, 변기 청소 혹은 다른 간호사들의 식사 준비 등 간호 학생과 간호보조원과 분업이 이뤄지지 않은 채로 업무를 수행했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시작한 파독 간호사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외국인이라서 받는 차별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임을 이해했고, 독일 특성을 파악한 한인 간호사들은 자신들이 차별 없는 직업 생활을 했다고 평가한다.
문화의 차이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을 겪은 가운데 파독 간호사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처음 겪는 타국 생활로 인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같이 갔던 친구 중에 2명이 향수병 때문에 그만뒀을 정도로 파독 생활에서 가장 힘든 일은 고향과 부모님 그리고 가족,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었다"라고 파독 간호사 양선주는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간호 여성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과 한국에 남겨진 가정의 분열과 파탄이 그들이 겪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김정숙은 어느 날 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독일에 있던 한국 간호원들이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어려우니 누나는 잘 생각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독일에 있는 간호원들이 고국으로 더 많은 돈을 송금하기 위해 오전 병원 근무가 끝나면 오후에는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파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헛소문이 어떻게 방영이 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30년을 살면서도 아직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파독 간호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 '신여성'을 향한 근거 없는 비방을 견뎌내야 했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떠나온 여성 중 일부는 가정의 분열을 겪었다. 1970년대 초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진 어느 50대 여성은 파독 간호사가 되었다. 계약 기간 3년간 꼬박꼬박 한국에 돈을 송금했으나 귀국한 그를 맞은 건 남편의 바람과 술로 탕진된 텅 빈 통장이었다.
양선주는 "결혼한 파독 간호사는 대부분 남편에게 돈을 전부 보내다시피 했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 돈도 잃고 가족도 잃는 불행한 경우가 꽤 있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1970년 <조선일보>는 몇 달 사이 발생한 독일 간호 인력 3명의 극단적 선택을 보도하며 국가의 지원 부족을 비판했다. 기사는 파독 간호사들이 송금하는 돈을 생각하면 이들을 위한 여성 상담 인력을 국가에서 지원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당시 노동청은 여성 노무관 한 명만을 지원했다. 파독 간호사 중 19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왜곡된 진실
1963년에서 1979년까지의 파견 기간에 총 117명의 청년이 죽었다. 117명 가운데 작업 중 사고로 사망한 광부는 27명,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한 간호사는 19명이다. 이역만리에서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64년 12월 파독 광부가 독일 땅을 밟은 지 1년이 되던 해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파독 노동자들과 만찬 자리에서 연설하던 박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자 하인리히 뤼브케 독일 대통령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화는 박 대통령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예화로 많이 쓰여 임기 중 일어난 많은 잔혹한 사건을 중화하는 용도로도 동원되었다. 이 이야기는 박 대통령의 통역사이자 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입안하는 데 참여한 백영훈의 저서 <아우토반에서 흐른 눈물>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언론보도에 박 대통령의 눈물을 보도한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은 한국인 파독 노동자들에게 연설하던 자리가 아닌 만찬 등 별도의 자리에서 만났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만난 날짜는 12월 7~8일 세 차례이고 박 대통령이 파독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함본 광산회사를 방문한 때는 9일 오전이다. 뤼브케 대통령이 원천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넬 수가 없을뿐더러 박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 또한 없다. 기록영상 등을 통해서 육영수 여사가 눈시울을 붉히며 손수건을 눈가에 갖다 대는 장면만 확인될 뿐이다.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가짜였지만, 계속해서 재생산되어 퍼져나갔다.
파독 노동자의 임금을 담보로 국가의 차관을 빌렸다는 기록 또한 거짓이다. 독일은 파독 노동자 계약 4년 전인 1961년에 체결한 '경제 및 기술협조 의정서'에 따라 상업 차관을 지급했다. 노동자 파견과는 무관하다.
이처럼 파독 노동자를 가난한 조국을 위해 희생한 청년으로 미화하는 인식은, 당연히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미래를 일궈내기 위한 파독 청년들의 개인적이고 진취적인 도전까지 과도하게 국가주의로 포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들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도전을 모두 국가적인 성취로 둔갑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박정희나 다른 인물의 '우국충정'을 끼워 넣는 그림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파독 노동자들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다. 파독 광부 대표 유계천은 귀국 후의 일터 주선, 화폐를 송금할 때의 환율 조정, 계약 기간 만료 후에도 계속 체류하여 일할 수 있게 해줄 것,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할 것 등 6개 건의 사항을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지만 "여러분 파독 광부들의 건의 사항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박 대통령의 말과 달리 건의사항 대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파독 광부 1차 1진 귀국자 115중 32명만이 공사 등에 취직이 알선되었다. 대부분의 파독 광부는 체류 연장조차 허가받지 못했다. 주지하듯 박 대통령은 노동 운동을 탄압했고 ILO 가입은 1991년에 이뤄졌다.

▲1964년 12월 21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김철환 유해 관리 미흡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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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노동자를 향한 정부의 소홀한 태도는 사망한 김철환 광부의 유해가 잘못 전달된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독일에서 화장한 김철환의 유해는 본가인 충남 서천이 아닌 서산으로 잘못 전달되어 유가족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뒤늦게 도착한 유해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아서 재가 흘러나왔다. 국내 광산 노조까지 나서서 항의할 정도였다.
파독 노동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각자의 이유로 고국에 꼬박꼬박 돈을 보냈다. 이들의 땀으로 일궈낸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국민 총생산(GNP)의 2%에 달했을 정도로 당시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러한 성과를 국가적 성취, 당시 지도자의 업적으로 칭송하는 어이없는 목소리가 아직 들린다.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국가는 이역만리로 떠난 한국 청년들의 울타리였다기보다 그들이 이겨내야 할 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살아남은 이들
파독 청년들에 대해 가난한 국가의 희생양이라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삶의 개척자로 보기도 한다. 당시 파독 광부 합격자 중 고등 교육을 이수한 사람의 비율이 높았던 만큼 귀국 후 사회 고위직으로 진출한 사례가 많다. 대학교수가 된 파독 노동자는 통계상 20명이며 신분 공개를 꺼리는 분위기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파견된 광부는 7936명이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편향적인 시선 때문에 파독 광부 연합회 가입자는 고작 500여 명이다.
파독 근로자 중 60%는 해외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찾았다. 독일로 떠난 간호 인력 중 독일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외교관, 의사 등의 직업을 얻은 사람이 많다.
한국의 세 번째 여성 대사를 역임한 김영희 역시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저 멀리 내가 모르는 넓은 세상에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라는 꿈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다. 3년의 간호보조원 근무 기간에 그는 남자 정형외과 병동에서 일하며 독일어, 영어, 불어를 배우면서 독일 대학 입학을 준비했다. 갖은 노력 후 퀼른, 하노버, 함부르크 대학 등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75년에 쾰른대학에 입학했다. 철학부 교육학과 내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학부에서 박사학위까지 10년 만에 끝낸 그는 한국 외교부의 독일 전문가로 특별 채용되었고, 마흔의 나이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사로 임명되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된다.
독일에서 병원장을 역임한 박경남은 22살의 나이에 파독 간호사에 지원해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그는 "여자가 대학에 가서 뭐 하냐며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했어요. 늘 가슴이 답답하고, 한국에서 뛰쳐나가야겠단 생각뿐이었어요. 해방돼 자유를 찾고 싶었지요"라고 말했다. 외과 병동에서 3년을 허드렛일하며 그는 간호사에 머물지 않고 직접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31살의 나이에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함부르크 의대에 합격하여 7년 만에 의사면허증을 땄다.
독일의 병원은 한인 간호사들의 성실성을 높게 샀다. 계약 종료 후에도 기간을 연장해 꾸준히 간호사로 활동한 이가 많다. 당시 한인 간호사에 대한 좋은 인식으로 여전히 독일의 많은 병원은 한인 간호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파독 노동자들이 김영희나 박경남처럼 모두 성공적으로 삶을 개척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당시 얻은 병으로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은 사례도 많다. 광부가 가장 많이 얻은 병은 진폐증이다. 진폐증은 석탄 가루와 돌가루가 폐 속으로 들어가 발병하기 때문에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쉬운 병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얻은 병은 한국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아 보상을 받지 못했다. 간호 인력 역시 근골격계질환을 앓은 노동자가 많았지만 이 역시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
권이종에 따르면 파독광부연합회에 가입한 500명 중 상당수가 1년에 1만 원인 회비를 납부하기 어려울 만큼 생계가 어렵다. 2015년, 2017년 그리고 2020년 5월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파독예우법)이 지속적으로 발의됐지만 정부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글
- 박서윤: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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