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나 사파타 말벡 아르헨티노 라벨 이미지라벨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아르헨티나 말벡의 역사를 상징한다.
Bodega Catena Zapata
카테나 사파타는 이탈리아 이민자인 니콜라 카테나(Nicola Catena)가 1902년에 설립한 아르헨티나의 와인 제조사이며, 아르헨티나 말벡(포도 품종) 와인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 와인 라벨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은 아르헨티나 말벡의 역사를 상징한다.
맨 왼쪽에 등장하는 '알리에노르 다키텐(Eleanor of Aquitaine)'은 아키텐 공작령의 공작이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국의 왕비였으며 12세기 중세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다. 아키텐의 카오르(Cahors) 지역은 말벡으로 유명하며, 기록에 따르면 알리에노르는 헨리 2세와 결혼하여 영국 여왕이 될 때 말벡을 영국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아마도 말벡 원산지와 연관된 유력 인물이라 첫 번째로 등장한 듯싶다.
그다음 '이민자(The Immigrant)'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연결한 탐험가와 모험가를 상징한다. 오른손에는 지도, 왼손에는 아메리카에 심을 종자를 들고 있다. 몸에는 화살이 여러 개 박혀있는데,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겪은 고통을 의미한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화살을 맞으며 순교한 성 세바스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세 번째 등장인물은 뼈만 앙상한 데다가 인상 참 고약한데, 유럽 포도나무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Phylloxera)'를 상징한다. 필록세라의 원산지는 북미대륙인데 19세기에 포도나무 품종 개량을 위해 북미 자생종 포도나무를 유럽으로 들이는 과정에서 유입됐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필록세라와 공생하며 면역력을 가진 북미 자생종 포도나무와 달리 유럽 포도나무는 내성이 없었던 탓에, 말 그대로 유럽의 포도밭이 초토화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때부터 유럽의 와인 업자들은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으로 이동해 해당 지역의 와인 산업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맨 오른쪽의 마지막 인물은 와인 제조사 카테나 사파타를 상징한다. 창업주 니콜라 카테나의 증손녀 아드리아나 카테나(Adrianna Catena)를 모델로 했다. 이 인물의 발치에는 선주민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를 본뜬 카테나 사파타 와이너리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라벨에 아르헨티나 말벡의 역사를 담을 만큼, 이 와인은 카테나 사파타 사가 자신 있게 내세우는 와인이다. 2017 빈티지는 RP(로버트 파커) 95점을 받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았다. 말벡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내가 순전히 라벨에 낚여 구입했지만, 코르크를 열고 병 주둥이에 코를 대니 피어오르는 가죽+바닐라의 강렬한 느낌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전혀 다른 품종인 고급 피노 누아 와인에서도 비슷한 풍미를 느낄 때가 있으니, 가죽+바닐라 향은 포도 그 자체보다는 아마도 양조 과정에서 사용하는 프랑스 오크통에서 기인할 것이다. 선호하지 않는 품종임에도 어쨌든 첫 느낌은 상당히 괜찮았다.
이 와인은 브리딩(와인의 맛과 향을 끌어내기 위해 공기에 노출시키는 작업)을 굉장히 오래, 심지어 반나절 하라는 조언을 본 적이 있어서 간만에 디캔터를 사용했다. 마침 집 근처 신장개업 고깃집이 마트보다 가격이 좋아서 한우 채끝으로다가 520그램 구입했다. 바람직한 붉은 빛깔 고기를 불판 위에서 마구 못살게 굴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디캔터에 담긴 와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니 곧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 좋은 와인을 안주가 망치다니

▲문제의 채끝 등심필록세라가 유럽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듯이, 이 소고기가 우리 가족의 뱃속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임승수
이제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콜라보를 탐닉할 시간이다. 먹기 좋게 잘린 채끝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씹기 시작했다. 인절미처럼 고소한 특유의 육향이 입안 가득 퍼지니 운동선수의 루틴처럼 자연스럽게 와인 잔으로 손이 간다. 저가 말벡의 앙상함과는 비교 불가한 꽉 채운 풍미, 거칠지 않고 매끄러운 타닌,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고 우아해지는 질감이 이 와인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말벡과 한우 채끝의 궁합이야 꼭 따로 언급할 필요 없을 테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병의 1/3쯤 비우고 절반을 향해 가는 중, 함께 마시던 나와 아내의 몸에서 이상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속이 메슥거리고 역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아닌가. 본전 생각에 꾸역꾸역 안주와 와인을 욱여넣었지만 이내 뱃속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주와 와인의 맛을 차분하게 음미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그때부터 일주일가량 설사와 싸우게 되었다. 와인 라벨의 그 인상 더러운 뼈다귀 필록세라가 유럽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듯이, 그날 먹은 소고기가 우리 가족의 뱃속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좋은 와인 마시면 뭐하나, 안주가 다 망쳐 버렸는데. 아이들은 그나마 증상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나와 아내는 콩 먹으면 콩 나오고 팥 먹으면 팥 나오는 지경이었으니, 체중이 2kg가량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다. 그 뒤로 다시는 그 고깃집에 가지 않는다.
라벨이 워낙 멋있어서 병은 보관 중이지만 배탈의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어 일단 밀폐된 수납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말벡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매우 훌륭한 선택이 될 와인이다. 다만 나에겐 와인의 추억보다 배탈의 추억이 더 강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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