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숲 속 산책에서 만나는 온갖 생명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말을 걸고 싶을 정도로 모든 생명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송성영
죽음의 사신처럼 다가온 암세포에 맞선 나의 배수진은 수행자들의 계율과 다름없습니다. 옛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행자가 목숨을 걸고 자비행을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계율을 지켜나가듯 나 또한 목숨을 걸고 암세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율이 필요 했습니다.
그 계율은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온몸의 기혈을 풀어주는 기혈운동. 그리고 술 담배를 끊고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 맵고 짜고 탄 음식과 발암물질,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꿔나가는 것입니다(명상, 기혈운동, 식이요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에 언급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나는 죽음의 사신 앞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끌어안고 숲속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바꿔 놓고 있는 암 덩어리야 말로 가혹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탐진치(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냉철하게 마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스승. 극과 극은 통하듯이 내 안의 무자비한 암세포는 인정사정없이 수행자를 탐진치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는 혹독하고 가혹한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결혼 전, 사랑과 자비심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해가며 한때 수행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파계승처럼 한 여자를 만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내가 품은 마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실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 내렸던 사랑과 자비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비로소 몸과 마음으로 절실하고 간절하게 안겨왔던 것입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암세포가 그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을 혹독하게 직시해가며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준 것입니다. 혈기왕성, 한창 젊었을 때조차 목숨 걸지 못한 수행자의 길을 암 세포가 주었던 것입니다. 이만한 스승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가운 바람을 끌어안고 숲속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바꿔 놓고 있는 암 덩어리야 말로 가혹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성영
주화입마
솔숲에서 기혈운동과 명상을 하고 기분 좋게 산막에 돌아왔는데 큰 아들 인효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빠,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뭘?"
"수술 받는 거."
"그 얘길 또 왜 꺼내. 너희들도 아빠 생각에 공감한다고 했잖아."
"수술 안 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대. 수술 거부한 암환자 만 명 중에 한 명이 살아남을까 말까 하대. 그리고 수술 안 하면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뇌까지..."
"누가 그래?"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 분이었습니다. 그는 수술을 거부한다는 나의 SNS 글을 접하고 그 결정이 걱정되어 큰 아들 인효에게 넌지시 전화를 걸어 수술하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의사로서의 소견을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의도와 다르게 겨우 아버지의 선택에 마음을 다잡아가고 있는 녀석들에게 두려움과 갈등을 심어주었고 부질없는 희망까지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그 아저씨는 아빠가 걱정되니까..."
"나도 그 아저씨 맘 모르는 게 아닌데, 이제 그 얘기 그만하자."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 눔 자식이! 맘 심란하게 그만해! 앞으로 그런 전화는 받지도 말고 받았어도 아빠한테는 얘기 하지 마! 니들이 그런 마음 내려놓지 못하면 아빠는 더 힘들어. 아빠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당장 산막에서 나가! 주화입마라고 어떤 것에 집중할 때 옆에서 자꾸만 딴 소리하면 오히려 독이 되니까."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화입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상이나 온 마음을 집중하고 있을 때 어떤 외부작용으로 인해 몸속의 기가 뒤틀려 호흡 곤란 등 몸과 마음이 큰 혼란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큰 아들에게 버럭 화 낸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다시 솔숲 길을 걸었습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만물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가득했는데 그 마음자리가 한 순간 이슬방울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숨고르기로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나자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겠노라는 아비에 대한 두 아들의 태산 같은 걱정과 슬픔과 고통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녀석들이 불쌍하고 내 자신이 불쌍했습니다. 태어나면 죽어야만 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가련하고 불쌍하게 다가왔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죽음에 대한 그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비로소 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암환자, 나약한 생명이라는 사실이 현실로 바싹 다가왔습니다.
▲숨고르기로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나자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겠노라는 아비에 대한 두 아들의 태산 같은 걱정과 슬픔과 고통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송성영
빛을 삼킨
영롱한 이슬방울로 왔다가
한 순간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너와 나
본래 하나이거나 없음을
2018.겨울 생명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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