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
수도영화사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으므로 고전 명작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과거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랐으며 윤리적 기준이 달랐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저러한 작품이 '명작'이라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시대가 야만적이었으며 나를 포함하여 해당 작품을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세상사를 백인 중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시대가 변해 가만히 있는 훌륭한 작품에 괜시리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태생부터 지니고 있었던 문제를 지금까지는 관객들이 전혀 알려고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 당시, 영화를 바라보는 흑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인가. 백인 주인에 의해 강간 당하는 흑인 노예의 삶, 부모가 노예이므로 그 자식 또한 자동으로 노예가 되는 삶, 이리 저리 금전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고 팔리는 삶,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누군가는 낮잠을 잘 동안 그 옆에서 부채질을 해야만 하는 삶을 실제로 살았던 이들의 마음 말이다.
흑인 노예제를 둘러싼 야만과 아픔이 이 영화에서는 모조리 생략되어 있으며, 오로지 스러져 가는 남부와 백인 자신들에 대한 연민만이 시종일관 떠돌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수많은 백인들,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인물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을 동안, 많은 흑인들에게 이 영화는 최악의 작품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면 다시금 예술작품에 대해 무조건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무너져 가는 남부를 살았던 백인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으며, 그들에게도 삶의 애환이 있었다고, 그 지점을 조망하는 것 또한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라고.
물론 그 이야기 또한 맞다. 무너져 가는 남부를 배경으로 당대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그린 작품은 여태껏 많았다. 미국의 대문호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 대다수가 그러하고, 또 다른 남부 작가인 플래너리 오코너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는 적어도 옛 남부가 무조건적인 유토피아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붕괴하는 남부를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동시에, 노예제도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그런 인물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자괴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했는지를 같이 조망했다. 그저 남부의 모든 것을 동화처럼 아름답고 아련하게 그려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물론 인종차별적 논란이 있다고 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지닌 모든 의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해당 영화의 존재를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비록 인종차별적 요소는 포함했으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다. 옛 남부의 풍경, 아름다운 인물들과 음악, 과거에 대한 향수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녹아 있다. 실제로 HBO는 논란이 불거지자 결국 영화가 지닌 문제점을 토론하는 영상과 함께 서비스 리스트에 작품을 복귀 시키기도 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종종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즐기고 향유하는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을 담보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할 동안 그 이면에는 실제로 해당 문화를 통해 억압받고 상처를 입는,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예술 작품을 단지 예술 작품으로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술은 늘 삶과 이어져 있다.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중 무엇이 먼저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늘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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