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 7일, 민주노동당 <기관지 준비 호외>.
민주노동당
2000년 1월 30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드디어 민주노동당 창당대회가 열린다. 당 대표로는 권영길 창준위 상임대표를, 부대표로는 노회찬(전 진보정치연합 대표), 박순보(전 전교조 부산시지부장), 양경규(민주노총 부위위원장)를, 그리고 사무총장으로는 천영세(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대표)를 선출한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준비 호외>(2000.2.7.)는 "창당 '이제 시작됐다'" "80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표지 타이틀 아래 "동지들, 창당됐습니다"는 제목으로 행사장의 풍경을 전한다.
창당선언문을 통해 민주노동당은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은 시대적 요청"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기본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당 강령은 "자본주의 질곡의 극복"과 "민족분단으로 인한 대립과 반목의 종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의 극복"과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 발전"을 통한 "새로운 해방공동체의 구현" "남한 자본주의의 천민성과 북한 사회주의의 경직성의 극복" "노동자와 민중 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등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당헌은 여성 30% 할당제와 모든 공직 후보자의 상향식 공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조현연, <한국진보정당운동사>, 후마니타스, 2009, 175~176쪽).
1997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국민승리21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거나 출세주의‧기회주의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합법정당=선거정당=개량주의정당'이라는 등식 아래 우편향적 실천이라는 비판적 평가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한 일간지의 칼럼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대안에 목말라하면서도 막상 대안을 자처하고 있는 정당에는 무관심한 현실에 대해서는, 일단 그 정당 관계자들이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다양성을 창출해 정치구조를 능동적으로 개혁하려는 국민의 '깨어 있는 정치의식'의 부족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진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정계에 기대 이상의 충격을 주었듯, 비록 소수 의석일지라도 기존 정당과 성격이 다른 정당의 정치인들이 국회에 진출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여 있는 늪과 같은 한국정치에 놀랄 만한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무성격의 기존 정당을 정책정당으로 변신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승삼, '대안정당에 주목하자', 중앙일보, 2000.2.11.)
훗날 노회찬은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대화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에 대해 이렇게 소회를 밝힌다(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129쪽).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변화는 정치에서 시작된다"
노회찬이 진보정당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회찬, '(여는글)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 「서문」,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2010 참조)
그렇다면 노회찬에게 '정치'란 어떤 것이었을까? "변화는 정치에서 시작된다."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2018) 한 단락의 소제목이다. 노회찬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는 공정, 평등, 평화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과제를 풀 수 있을까요? 우선, 정치를 바꿔야 합니다. 불공정한 불법 채용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함도, 한반도의 평화도, 정치가 움직이면 바꿔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면 쿠데타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사회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촛불 이후 대두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86쪽)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정치를 재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79쪽).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를 재인식하는 것이다. 현실 정치는 현실의 국민과 소통하고, 그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지지를 얻고, 참여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를 자기 운동의 관성과 관념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본다. 정치 그 자체를 중시하는 게 아니라 운동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2002년 9월, 브라질 노동당 대통령 후보 룰라를 만난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그에게 고려인삼을 선물하는 장면.
노회찬재단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노조 활동에서 정치 활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노동운동의 프로젝트를 정치의 프로젝트와 혼동하면 안 된다." 브라질 노동자당(PT) 룰라의 이야기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97쪽).
"중요한 핵심이다. 정치의 해법과 노동조합의 해법은 다르다. 노동조합운동의 연장선에서 정치를 바라보면 결국 이익집단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한다. 정치가 또 하나의 해결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와 노동운동은 그 문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국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조봉암만큼 선거와 정당을 중시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조봉암은 정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꿈을 키웠고 정당 속에서 성장했으며 정당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 조봉암 정치노선의 특징은 정당정치, 의회정치·대중정치를 결합하려 했다는 점이다."(조현연, '조봉암과 21세기 진보', 진보신당 미래상상연구소 토론회, 2009.7.29.).
조봉암 이후 선거와 정당을 중시한 진보정치가를 꼽으라면 노회찬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재인식, 특히 선거에 대한 진보진영의 재인식을 강조하면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노회찬, '진보정당 건설의 전략과 전망', <노동사회> 통권 37호, 1999년 10월호).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부르주아 대의체제 하의 모든 정당들은 선거를 통해 평가받고 선거 결과에 따라 영향력의 증대와 쇠퇴를 겪게 된다. 정당인 한 이것은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는 것은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진보정당으로 성장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자기고백이다. 100년을 넘어서는 유럽 진보정당의 역사는 자신들이 취한 정책의 변천과 선거에서 획득한 의석 수의 변화를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선거를 치르면서 반성했고 선거를 통해 성장했다." 노회찬은 그에 화답하면서 공직선거에 출마한다. 권력의지를 실현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회찬이 출마한 공직선거 포스터 사진. 왼쪽 위에서부터 2008년 제18대 총선 진보신당 서울 노원병 후보(낙선), 2010년 지방선거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낙선), 2012년 제19대 총선 통합진보당 서울 노원병 후보(당선, 2013년 '삼성 X파일 떡값검사' 실명 공개 혐의 의원직 상실), 아랫줄 왼쪽부터 2014년 7·30 재보궐선거 정의당 서울 동작을 후보(낙선), 2016년 제20대 총선 정의당 경남 창원 성산(당선). 2004년 17대 총선 제외하고 5차례 출마한 선거에서 모두 똑같은 사진을 사용했다.
선거정보도서관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정치에 대해 이런 말을 나눈다.
"정치의 매력은 권력 의지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길이지요.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것은 이론과 실천의 총화에 의해 가능하지만 이를 실현시키는 것은 결국 권력입니다. 따라서 사상과 철학에 조응하는 권력 획득 방식도 연구, 분석의 중요한 대상입니다. 정치란 곧 권력획득을 위한 실전의 장입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38; 139쪽).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선 권력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한다.
"정치와 정당은 선거에 나가 권력을 추구한다. '우리가 하면 더 잘살 수 있다. 더 깨끗하게 하겠다.' 이렇게 나가야지, '나는 권력욕이 없습니다.'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왜 권력욕이 없어? 권력욕이 없으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지."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84쪽)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④] 정치전략 - 거대한 소수, 진보의 세속화(6월 19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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