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노련 이슈를 다룬 1990년 3월 30일 치 '한겨레'.
한겨레 갈무리
노회찬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보여지듯이 인민노련은 결국 이적단체로 규정된다(대법원 1991. 2. 8. 선고 90도2607-노회찬의 상고사건에 대한 판결, '법원공보' 제893호, 1991.4.1.).
"살피건대, 위와 같은 현실인식, 통일이념, 목적, 사업 및 조직의 인노련 활동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뿐만 아니라 폭력 비폭력, 합법 비합법 등 각종 투쟁형태를 적절히 배합한 반제,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여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여 남한 단독으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한 다음 북한과 통일을 이룬다는 북한의 선전선동활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노련은 국가보안법 제7조 제3항 소정의 이적단체에 해당한다."
* 참고로 활동 초기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인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는데, 양승조 등이 이끌던 과거의 '인노련'과 혼동을 주는 바람에 점차 '인민노련'으로 불리게 된다.
대법 판결이 있고 십수 년이 흐른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민노련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명예회복 판정을 내린다. 노회찬은 복권됐지만 민주화운동 유공자나 보상 신청은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을 깨달으면서 오히려 내가 구원받았다"라며 자신은 희생한 것이 아니라 혜택받은 것이라고 겸손해했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10쪽).
인민노련과 사회주의의 관계
한 조직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기본적으로 강령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령이란 조직의 이념과 정체성, 지향하는 바 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26일 결성 이후 인민노련의 강령은 1988년 10월과 1989년 2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된다. 1989년 2월 20일의 개정은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개정은 한 차례였다고 볼 수 있다(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엮음, '87·88년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인노련 선집', 거름, 1989).
결성됐을 당시 인민노련은 타투와 NL이 동거하는 조직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조직노선 논쟁이 벌어졌다. NL의 '정치적 대중조직(PMO)' 노선과 타투의 '정치조직(PO)' 노선인데, 정치적 대중조직은 일종의 정치활동을 하는 단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정치조직은 '정당조직(당시는 비합법 전위정당의 의미가 컸다)'을 지향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비판적 지지노선'과 '독자노선' 사이의 논쟁이었다(인민노련, '인노련 활동평가 보고서', <정세와 실천> 2호, 1987.10.18.).
이 두 가지 주장은 2박 3일 동안의 10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독자노선'으로 정리되었다. 정태윤, 최봉근, 황광우, 이희경, 홍승기, 김상준, 이호곤, 신정길, 고남석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 표결 결과 독자노선: 비판적 지지: 기타가 12:4:1로 결정됐다. 결과가 나오자 NL은 퇴장·탈퇴하였고, 인민노련은 새로운 강령을 다시 채택했다.
인민노련은 1988년 10월 수정된 강령에서 조직의 목적과 활동목표를 이렇게 설정하고 있다.
"인노련은 당면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인천·부천 지역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이 되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촉진시키며,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부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정치적 통일과 노동자 정당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한편으로, 인노련은 파쇼 정권에 반대하여 싸우는 모든 계급·계층 및 정치세력과 적극 연대할 것이며, 특히 전민중의 정치적 통일조직을 형성해 나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엮음, <87.88년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인노련 선집>, 거름, 1989, 37쪽)
인민노련과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65~66쪽).
구영식 : "어떤 사람은 인민노련을 두고 '최초의 남한 자생적 사회주의자 조직'이라고 평가한다."
노회찬 : "최초는 아닐 거다. 이전에도 '과학적 사회주의자 동맹'처럼 크고 작은 사회주의 그룹들이 있었으니까. 다만 우리는 공공연하게 활동했고, 법정에서도 '우린 사회주의다.'라고 선언했다."
구영식 : "인민노련은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것인가?"
노회찬 : "조직의 강령을 보면 사회주의혁명의 전 단계인 인민민주주의혁명, 반제국주의·반파쇼를 지향했다. 사회주의는 그 후의 문제였다. 물론 가치에서는 사회주의적 신념이 조직의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구영식 :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노회찬 : "인민노련은 처음부터 NL그룹과 같이했고, 그러다 보니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노련이 사회주의를 조직의 전면에 내걸지는 않았다. 물론 본격적으로 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 우리는 대중성을 중시했다. 사회주의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이렇게 급진적인 단체 중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곳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인민노련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통해 노동운동 내부의 신뢰를 확보했고, 그것에 기초해 조직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후일 노회찬은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고 노회찬 의원.
노회찬재단
"사회주의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영국 노동당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 구(舊) 소련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게 아니다." (<헤럴드경제>, 2017.9.2.)
"현존했던 사회주의는 실패했어요. 인정합니다. 인류 역사 5000년에서 보면 자본주의 시대는 200년밖에 안 돼요. 우리가 살아왔던 체제가 자본주의였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본주의의 한계를 알면서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반대하는 거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문제점은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계속 시도해야 사회가 좋아지는 것 아닐까요?" (임지은, '[인물탐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노동자들의 슈바이처, 그 사랑의 줏대', <월간중앙>, 2004년 10월호)
임지은 기자는 "'위험한 사회주의자'와 '유연한 진보주의자'라는 평가의 갈림길에 선 그가 꿈꾸는 곳"이라면서 2004년 9월 어느날에 있었던 노회찬과의 인터뷰를 이런 글귀로 마무리한다.
"지금 읽는 책은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봄이면 산에 쌓인 눈 녹이며 거장 먼저 피는 '앉은부채', 씨앗만으로는 부족해 가을날 시들어가며 잎 끝에 새끼를 낳는 '처녀치마', 꽃가루받이 곤충 위해 나선모양으로 꽃 피우는 '타레난초' 등을 담은 사진이 '너무' 좋단다. 자신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는 사람'이라며 시간 나면 가려고 좋은 곳 많이 알아두었다고 자랑이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세상에 사랑할 것이 '너무너무' 많다면서 사랑을 아끼지 말자고 한다. 꽃·나무·풀·새·이웃·국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사랑을 나누는 세상."
▲광릉숲 풍경.
문화체육관광부
"2004년 들어서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 그 순간 |
2004년 8월 31일 <노회찬의 난중일기>의 '하루 종일 광릉 숲에서 지내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앞으로 150년은 더 살 수 있었던 전나무 열 한그루는 인간이 내뿜은 자동차 매연으로 인해 자기 수명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였다. (...) 이유미 박사가 토종 물봉선화를 가리키며 이름을 외우라고 한다. 흔히 손톱 물들이는 데 쓰는 '울 밑에 선 봉선화'는 겨우 백 년 전에 들어 온 외래종이라고 말해 준다.
나물의 제왕 곰취가 놀랍게도 아름다운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도 가리켜 준다. 산초나무를 가리키며 추어탕 먹을 때 넣는 산초는 산초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초피나무 열매란다. 우리나라 특산종인 금강초롱의 학명이 일본인 이름으로 된 사실을 들며 식물이름도 '국력'이 반영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름을 아는 식물은 더 아끼고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식물 이름을 알게 하는 것이 곧 자연보호의 지름길일 수 있다는 이유미 박사의 지론이다. 영어단어 2000개를 아는 것보다 나무, 풀 이름 200개를 알고 있는 것이 훨씬 값진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 아쉬움을 묻어두고 식물의 세계를 떠나 동물의 세계로 돌아왔다.
숲은 미래다. 숲은 관념이 아니라 과학이다. 숲이 병들면 미래가 병드는 것이다. 숲에서 지낸 7시간. 2004년 들어서서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 |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③] '정치를 만나다'(6월 16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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