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 국회의사당 앞 풍경
권은비
다시 국회의사당을 향해 앞으로 걸어본다. 양 옆으로 광활한 잔디밭이 펼쳐진다. '잔디를 보호합시다'라는 표지판을 넘어 저 푸른 잔디 위에 앉기라도 한다면 당장 끌려 나올 것 같다.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길 중심부에는 '평화와 번영의 상'이라는 이름의 분수대가 있다. 그 뒤편으로 1976년에 세워진 '애국애족의 군상'이라는 제목의 청동 조형물이 양옆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조각 속 여성은 한복을 입고 있고, 남성들은 저마다 근육질의 몸에 하반신에는 면보를 걸치고 있다.
'평화와 번영의 상' '애국애족의 군상' 모두 김세중 조각가의 작품이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 김세중 조각가는 이렇듯 한국의 주요 정치적 거점마다 높고 육중한 조형물을 세웠다.
과거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조형물은 "고뇌와 정지에서 벗어나 결의와 결심을 갖고 태극기와 무궁화를 받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대로 조형물 속의 국민은 국가로 상징되는 무거운 태극을 받들고 있다. 받들어야 하는 국가, 그것은 어쩌면 조형물을 만들었던 1970년 후반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겠다. 국민은 국가를 받드는 존재였던 것이다.
공공장소의 예술작품, 상징물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리 해석되곤 한다. 한국은 산업화 이후, 이른바 근대가 아닌 '현대'의 풍경을 만들어가는 시기였던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걸출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을 적극 활용해 국가의 모습을 계획하고 실현해왔다. 그때의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듯, 예술가들도 그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는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폭력이 국민들에게 거침없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국회의 대표 조형물들에 대한 감상은 각자의 몫이겠으나, 국회 안에 국가권력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거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다룬 상징 조형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꽤나 씁쓸하다. 그렇다고 지금부터라도 몇억 원대의 국고를 들여 상징조형물을 국회에 만들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제발 높고 거대한 국가 민족주의적 프로파간다 조형물은 그만 만들자 외치고 싶은 쪽이다.
그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국회였으면
그러나 국회의사당 앞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반짝이는 검은 세단과 승합차들을 보며 공상에 빠져본다. 언젠가 다시 국회에 산책하러 온다면, 그때는 담장이 없는 국회의 넓은 풀밭 곳곳에서 시민들이 느긋한 산책을 즐기고, 국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쉬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걸어 다니는 국회의원 몇 명쯤은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었으면 한다.
어느 이주노동자는 가족과 함께 놀러 와 국회의원회관을 가리키며 '저 의원실에서 우리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더라'라는 이야기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그런 국회였으면 한다.
어떤 풍경은 풍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정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의 국회 풍경에서 나는 국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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