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앉아있는 여인’ 1963년. <박수근>(갤러리현대, 2002)을 재촬영 한 것이다.
갤러리현대
1953년 박수근의 창신동 시절이 시작된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열어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세계를 확립한다. 화강암 같은 질감의 바탕에 단순화된 선과 구도로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때 대부분 탄생한다.
훗날 이곳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한국 미술사를 빛낼 뛰어난 명작으로 자리 잡는다. 한편으론 해방 후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중견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구축해 나간다.
국전에서 거듭해서 입, 특선을 하며, 결국 1962년에는 심사위원의 위치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을 통해 결국 국전의 부조리에 환멸을 느끼고 좌절하고 만다.
제6회 국전에서는 야심차게 제작한 100호짜리 '세 여인'이 낙선하며 화단의 부조리한 모습을 목격한다. 또한 제11회 국전에서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소'와 '유동'을 내었으나, 심사 과정에서 심한 화단 파벌의 갈등을 보며 화단 현실에 실망한다.
이 당시 실의에 찬 박수근을 지탱해준 곳은 소공동 반도호텔에 있던 화가 이대원(李大源)이 운영하던 '반도화랑'이었다. 이곳은 주로 외국인들에게 기념품처럼 그림을 파는 곳이었는데, 박수근의 그림이 한국적인 모습을 그려서인지 외국인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때 대표적인 고객이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인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er)'였다. 그는 박수근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하였고, 다른 외교관 부인들과 함께 박수근의 낡고 허름한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마가렛 밀러는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우편으로 그림을 사주고 미술 재료도 보내 주는 등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이때 그린 그림 중에 박수근의 미술 세계를 대표하는 명작들이 많다. 그 중에서 박수근 미술세계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앉아 있는 여인(座婦)'이다. 이 작품은 1963년 창신동 시절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그린 것으로 화면 한 가운데 중년의 여인이 깊은 생각을 하며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떤 다른 장치도 없이 여인 한 명만을 그리고 있음에도, 화면 전체에 흐르는 긴장감이 보는 이를 전율케 하는 면이 있다.
그림 속의 여인은 지난 날 격변기를 지탱해 온 한국 여인의 표상이자 한국 어머니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의 모습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더 강한 사색이 깃들어 있고, 여리면서도 강한 어깨에는 인고의 세월을 살아 온 한국 여인들이 감내해온 시간의 무게를 담고 있다.
한국 여인을 소재로 한 한국 미술 작품 중에 이보다 더 단호하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작품이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박수근 미술의 한 측면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전농동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다
박수근은 1963년 전농동으로 이사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다. 그는 이때 왼쪽 눈을 잃는 불행을 마주한다. 일상화된 과음으로 인해 간과 신장이 나빠졌고, 이로 인해 백내장이 온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미루다 악화되어 결국 실명까지 이른다. 그는 이후 제대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워진다.
겨우 1964년에 제14회 국전의 추천작가로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작품을 내고, 이후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다. 이듬해 4월 건강이 악화되어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해 간경화와 신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으나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듣는다.
한 달 만에 퇴원을 하였으나, 바로 다음 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죽기 전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은 남겼다고 한다. 평생 가난한 화가였던 그에게 이 세상은 그저 험난한 고난의 세월로만 느껴졌던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