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6 18:03최종 업데이트 20.01.06 18:10
  • 본문듣기
당신은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100년 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고작 몇 명 알았습니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지요. 그동안 대한민국이란 단어는 각자에게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대한민국 100년이 되는 2019년은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올해는 제게 몰랐던,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을 만나는 의미 있는 한해였습니다.


어떤 여행은 돈과 시간만 쓴다면, 어떤 여행은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저에게 이번 탐방은 후자였습니다. 제게 이번 3박 4일간의 역사탐방이 특별했던 이유는 잊혀졌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지난해 12월 겨울, 저는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한 '임시정부 100주년 6차 역사탐방'에 참여했습니다. 올해 마지막 탐방이었다고 합니다.

이불속에서 귤껍질을 까며 영화 한편 감상하고 싶은 계절. 우리는 편안한 삶을 살아가느라 잊은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고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집 밖에 나갔던 이유는 나 스스로가 아닌 국가와 민족, 미래의 세대를 위해서였습니다. 오로지 독립, 독립, 독립이라고 외쳤지만 그들도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간호사입니다. '간호사가 역사탐방에 왜 갔나요?' 다들 의아해합니다.

간호사란 직업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을 하는 간호사입니다. 직업 특성상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 경계에 놓인 사람들의 여러 가지 감정을 넘겨받습니다. 불안감, 공포 등의 감정. 사람의 인생에서 단 한번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 말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을 어떠하였을까요? 매번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이죠. 나의 행동이 나를 위협하고, 나의 행동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협하는 무서운 일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따뜻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타향에서 의롭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죽음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수의 몇 명만 기억할 뿐이죠.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들이라고 하나도 안 무서웠을까요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진행한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2차 탐방단은 지난 9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 동안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등을 방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피난처,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 난징대학살기념관, 리지샹위안소 등을 돌아봤다. 사진은 '난징대학살 기념관' 내부에 걸려 있는 학살 당시 난징 주민들 사진. ⓒ 오마이뉴스 장재완


첫째 날 상하이 홍구공원(루쉰공원)에 갔을 때 저는 윤봉길 의사를 만났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에서 물통형 폭탄을 투척하고 의거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내 목숨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과연 그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요? 저 또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선택이 두렵고 어려운 사람입니다.

1994년에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해 매정(지금은 매헌이라고 불립니다)이라는 생애사적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타국에서 윤봉길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애니메이션 형식의 관련 동영상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윤봉길 의사. 그도 사람인데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해야 했고, 임시정부 요원은 자싱(가흥)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자싱(가흥)에 있는 임시정부 요원거주지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는 백범 선생과 그의 가족, 이동녕 선생의 가족, 김의한 선생의 가족, 엄항섭 선생 가족의 방이 복원돼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진으로나마 인사를 드렸고, 역사의 흔적과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알알이 새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매만가 76호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김구 선생의 피난처로 중국 주보성의 아들 첸둥성의 집이었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도 같은 민족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당시 현상금이 어마어마했던 김구 선생이 미래를 계속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분들의 도움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이곳의 2층에는 비상로가 있었고, 또한 집 옆에는 바로 강가가 있어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김구 선생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밤에 돌아오곤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자싱에서 항저우로 이동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저우 청사와 사흠방, 오복리, 군영 반점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김철, 송병조, 차리석이란 인물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탐방에서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에 가면 위의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낯설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들어 제 얼굴이 금방 붉어졌습니다.

셋째 날 아침, 항저우에서 바로 난징으로 갔습니다. 4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 피곤하고,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내일이면 일정을 마무리하고 이불속에 돌아가 편히 쉬면 된다는 생각을 했기에 희망과 안도감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시간은 불투명했을 겁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거주지를 계속 옮겨야 했고, 머나먼 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길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목적지. 내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난징 대학살기념관은 아쉽게 공사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밖에 세워진 동상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그 안의 역사가 얼마나 잔혹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밖에 서 있는 동상들은 한나라를 다스린 지도자의 동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일 수도 있었던, 각각의 아무개들의 눈물이었습니다. 건물 한 바퀴를 빙그그 돌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이후 거친 산행길에 올랐습니다.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훈련소인 천녕사였습니다. 무성한 풀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듬어진 길을 걷고 싶어 했지만, 천녕사로 올라가는 길은 외지고, 그들이 걸어갔던 고단한 삶만큼 거칠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육사도 1기생이었다고 합니다. 탐방에 동행했던 국어 선생님께서 낭독한 이육사의 시를 들으며 이육사란 사람을 기억해보았습니다. 당시 청년들의 노력과 김원봉 선생이 나라를 위해 애썼던 마음을 새겼습니다.

남경에서는 청녕사 말고도 김구 선생이 잠깐 살았던 곳인 회청교, 장제스와 김구 선생이 회담한 중앙반점,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의 눈물의 흔적이 있는 리지샹위안소유적진열관도 들렀습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따뜻한 이불속으로 말이죠. 귤도 까고 있고 영화도 한 편 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차 했습니다. 역사탐방에 다녀와서 편히 쉴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3박 4일의 역사를 잠깐 공부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역사탐방은 오전 5시 30분에 기상해 밤 12시에 자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간호사로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역사 속 사람을 만나는 길이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제게 역사탐방은 과거 그 시절, 어쩌면 불행한 세대라 할 수 있을 사람들, 시대를 탓하며 남이 사는 대로, 관성대로 누리며 사는 것을 거부하고 살아간 사람들을 뒤늦게 만나는 자리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했습니다. 잊지 않겠다고.

각자 안 힘든 사람이 없다고 한다지만 그래도 지난 역사보다 우리가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그 어려운 시대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낸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각자 삶을 누리고 있는 이유는 독립운동가, 그 사람들의 희생과 그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고 새기는 일. 그게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의미가 있다고 하죠. 몇십 명 고작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까닭은, 내가 여기 있는 까닭은, 내가 나인 까닭은 많은 독립운동가가 가슴속 에너지를 불태웠기 때문이겠죠.

이제는 불확실한 미래에 희망이 빛이 들기를,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빛이 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픈 역사에 상처받은 어머니의 절규에도 빛이 들기를.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이 마르도록 역사를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현선님은 임시정부 100주년 6차 역사탐방 참가자입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