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게 웃고 있는 오윤주 목사 내외위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푯말이 보인다.
민병래
오윤주 부부가 이곳에 왔을 때 장안동에만 방앗간이 28군데였다. 그때는 나름 장사가 재미있었다. 결혼 성수기나 설날에는 며칠씩 밤도 샜다. 어느 날은 밤을 꼴딱 새고 새벽을 맞았을 때 동네 할머니가 "젊은 부부들이 밥은 먹으면서 일하느냐"며 따뜻한 국밥을 담아 오신 적도 있었다.
그랬던 방앗간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IMF 직후. 동대문 원단시장이 가까워 집집마다 편직기를 돌렸던 장안동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당연히 이전·확장 고사 떡이 줄어들었다. 또 대형마트에서 고춧가루와 기름을 편히 살 수 있고 중국산 때문에 가격도 낮아져 재래식 방앗간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왔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다섯 시부터 시작한 가래떡 작업은 어느덧 오전 아홉시를 가리킬 때까지 이어졌다. TV에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어렵겠다'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바깥 날씨는 꾸물꾸물할 뿐 눈올 기미는 없다.
시계를 보던 아내가 "이제 올라가서 아침 드시고 설교 준비해요"라고 재촉한다. 성화에 못 이겨 오윤주가 떡가루를 훔쳐내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안녕하세요. 오늘 성탄절인데 예수 믿고 부자되세요"하며 나이 지긋한 여자 둘이 성경을 끼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우리 교회 엄청 커요. 목사님이 능력 있어서 성전을 크게 지었어요"하며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오윤주는 "여기 이 양반도 목사님이에요"라는 아내의 목소리, 당황하는 두 여자의 표정을 뒤로 하고 방앗간을 나섰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교회 성추문'이라는 말이 언뜻 TV에서 흘러나왔다.
3층 교회로 들어서는 계단 앞에는 벌써 유모차와 보행기들이 여러 대 줄지어 서있다. 예수생명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거동이 시원치 않아 노인들이 의지해온 보호장구들이 예배 때면 길게 줄을 선다.
오윤주가 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는 고물장수를 하던 총각 시절, 어머니처럼 따뜻한 신도를 만난 덕분이었다. 그 후 경희대 앞 책방을 하던 76년, 산정현교회에 다니면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그때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49살의 나이에 감옥에서 순교한 사실을 알았고 이는 청년 오윤주에게 평생 큰 가르침이 됐다.
가난한 교회의 성탄 풍경
그 후 평범한 교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 장안동은 변화를 주었다. 마침 방앗간 건물 3층에 교회가 있었다. 젊은 목사였는데 교회에는 성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새벽예배도 없었다. 성인 게임방에 빠졌다느니 이런저런 소문도 돌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오윤주는 안수집사, 장로를 거치면서 7년 동안 목사를 대신해 4시 30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이끌었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목사안수를 받으라고 권했다. 그래서 오윤주는 김국경 목사가 총장으로 있는 '선목총회' 신학원을 다녔다. 여기서 속성으로 2년 8학기를 마치고 1년 반 동안 대학원을 다녀 목사가 되었다. 그때 따가운 눈초리들이 있었다. "군소신학교에서 무자격 목회자를 양산한다", "영적 수준이 낮다", 그런 말들이 수군수군 들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2000년, 방앗간의 3층 교회를 인수했다. 새롭게 꾸미면서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모두 헌금으로 처리했다. 워낙 신도들이 적고, 형편 어려운 노인들이어서 헌금이래야 일이천 원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례비, 목사 월급을 받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했다. 심방비는 모두 교회에 헌금했다.
이때 오윤주는 교회 이름을 '예수생명교회'라 바꾸고 '딱한 어르신 모시기'로 방향을 세웠다. 노인대학도 만들어 장안동과 전농동 노인정을 돌며 홍보했다. 예배를 마치면 점심 끼니를 대접했고 돌아갈 때는 쌀 1kg을 봉지에 담아 나눠줬다. 그러다 보니 교회 재정은 늘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19년이다.
30평 남짓 되는, 소박한 제단에 양 옆으로 신도들이 앉는 의자가 열줄 정도 놓여있는 교회당, 예수생명교회의 11시 성탄절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수생명교회의 교회당 전경작고 소박한 교회, 오윤주 목사는 이곳에서 19년 동안 사례비, 목사 월급을 받지 않았다.
민병래
성가대의 찬송가는 긴 고갯길을 쉬엄쉬엄 넘어가는 발걸음 같았다. 앉고 서는 예배 동작은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듯했다. 그래도 성탄 예배 덕인가, 오늘은 제법 자리가 찼고 활기가 있었다.
사실 초빙 전도사 중에는 "목사님, 우리도 부흥회 한번 합시다"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도 교회 신축사업 벌려 성전 헌금을 받자"는 제안도 있었다. 오윤주는 다 마다했다. 성도들에게 부담 주지 말고 내가 '방앗간 사역'을 더 하면 된다고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찬송가가 끝나고 오윤주는 천천히 성탄 설교 말머리를 열었다. 어느 결에 올라와 성도들 식사 준비까지 마친 아내가 뒤쪽에 보였다.
"교회는 큰 건물이 아닙니다. 화려한 장식이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낮은 곳에 임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섬기는 마음이 교회입니다."
오윤주의 음성이 조금씩 높아진다. 창가에는 꾸물대는 하늘만 보일 뿐, 아직도 성탄을 축하하는 눈소식은 기미가 없다. 설교가 달아올라도 까믓 조는 할머니, 긴 하품에 주름을 더하는 할아버지, 그저 아멘 아멘만 읊조리는 신도들이 보인다. 오윤주는 이 모습, 이 예배 장면을 사랑한다.
그런데 걱정이다. 자신도 이제 칠십이 넘어 예수생명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후배 목사를 발굴하고 키우고 싶다. 하지만 젊은 목회자들은 대형교회에 취직(?)을 하려고 할 뿐 작고 힘없는 교회는 외면한다.
문득 돌아본 창가에 뽀얀 쌀가루 같은 눈 한 송이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바람에 잠시 주춤하더니 26년 된 방앗간 간판의 헤진 글씨 '대'자에 다시 '성'자에 잠시 머무른다. 오윤주가 설교를 마치니 다시 긴 고갯길을 넘어가는 찬송가가 시작된다.
<못다 한 이야기>
1. 이 글은 성탄절 이전에 작성하였지만 성탄절을 배경으로 재구성하였고 TV프로나 전도 방문 역시 성탄절로 맞춰 구성하였습니다.
2. 방앗간 창고방에서 재우기까지 하며 키운 두 따님은 훌륭히 성장, 한 분은 민주노총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낮은 데로 임하는' 변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 오윤주 목사님은 늘 가슴에 새기는 성경구절로 마태오복음 9장 12절과 13절, 20장 20절을 꼽습니다. 각각 인용하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한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4. 오윤주 목사님은 많은 존경하는 분들을 통해 배웠지만 특히 세 분 목사님
-- 직접 만나뵈지는 못했지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 결혼 주례를 서주시고 신앙생활로 인도하신 회기동 산정현교회 김광수 목사님
-- 목사의 길로 안수해주신 선목총회 김국경목사님이
자신을 어려움 속에서 잘 인도해준 표상이라고 말합니다.
<오윤주의 B컷>
▲오윤주 목사 모습영락없이 이웃집 아저씨처럼 인자한 모습이다
민병래
▲가래떡을 뽑아 말리기 위해 이동하는 장면이 공정은 부부 호흡이 정말 중요하다
민병래
▲예배를 집전하는 오윤주 목사예배를 모실 때는 근엄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이다
민병래
▲오윤주 목사 부부가 꾸려가는 대성방앗간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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