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카75 펜촉
김덕래
언제나 함께하는 나만의 반려펜
펜촉이 어느 정도 자리잡으면 잉크를 충전합니다. 지금부터 최적의 잉크 흐름과 필감을 찾아내야 합니다. 만년필 펜촉은 아주 섬세합니다. 마치 갓 돌 지난 어린애 같아, 무심히 대하면 투정부리기 일쑤입니다. 긁힘과 끊김. 형편없는 손맛을 보여주는 펜이더라도 공들여 다듬다 보면 조금씩 순해집니다.
정상적인 만년필은 손에 힘을 빼고 써도 잉크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합니다. 펜촉이 종이를 거칠게 긁지 말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잘 나오는 펜이라면 구태여 과한 필압을 주고 쓸 이유가 없지요.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답답해지고, 그래서 손에 힘을 줘 눌러 쓰는 겁니다. 그러면 펜촉은 점점 더 틀어지게 됩니다. 종이를 긁고 잉크 흐름도 불규칙해집니다.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망가진 펜은 고치면 됩니다. 잘 손봐진 펜은 촉에 단차가 없고, 슬릿 간격도 적당합니다. 그러면 가볍게 쥐고 써도 잘 나오고 부드럽습니다. 그 상태로 오래 길을 들이면 만년필은 점점 더 내 것이 되어 갑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나만의 반려펜이 됩니다.
수리도구는 오직 두 손뿐. 손가락 끝 손톱을 세우고 눕혀 펜촉을 휘고 폅니다. 절대 연한 펜촉보다 강한 금속도구를 사용하면 안됩니다. 펜촉을 수리하다 보면 손톱 끝이 조금씩 우둘투둘하게 깨집니다. 너무 짧으면 도구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고, 또 길면 힘을 받을 때 휘어버려 곤란합니다. 수시로 깎아 손톱 끝을 반듯하고 적당하게 유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일한 수리 도구니까요.
만년필을 수리한다는 건, 마치 펜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불편하다 호소하는 부분을 한곳 한곳 손보다 보면 어느새 한 자루의 필기구가 살아나 있습니다. 컨디션을 회복한 펜은 부드럽고 매끈한 필기감으로 화답합니다. 가끔 만년필에도 생명이 있는 게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해요.
수십 장 써가며 필감을 끌어올립니다. 만년필은 장식품이 아니니 겉보기만 좋아선 안 됩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술술 부드럽게 써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주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좋아집니다.
만년필은 예민한 구석이 있는 도구라 사용자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마치 반려동물과 같습니다. 정성이 드는 만큼 애착도 더 깊어집니다. 내 손길이 필요하니 마음이 쓰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 이집트인의 갈대펜 이전에도 인류는 나뭇가지나 돌을 뾰족하게 갈아 기록도구로 사용해 왔습니다. 사람은 손을 이용해 뭔가를 기록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거지요. 그런 이유로 모든 필기도구엔 인문(人文)의 향이 배 있습니다. 기운이 스며 있습니다.
펜 내부 세척, 펜촉을 손본 다음, 잉크를 충전해 충분히 테스트 해줬습니다.

▲파카75 세척
김덕래
이제 절반 왔습니다. 써지지 않는 만년필. 외관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을 겁니다. 은세정용 융과 세척액으로 꼼꼼히 닦아 광을 내줍니다. 표면이 매끈했으면 금방 끝났을 텐데, 틈새 사이사이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마냥 시간이 갑니다.
이 펜엔 길고 깊은 이야기가 스며 있습니다. 딸을 품에서 떠나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사위에게 파카75를 건네는 아버지의 속내를 감히 짐작해 봅니다. '내 청춘이 담긴 펜일세. 내가 오래된 이 펜을 잘 간직해 온 것처럼, 내 몸보다 더 아껴온 딸아이를 이젠 자네가 살피고 보듬어 주길 바라네.'
숙성이 잘 된 스테이크는 이미 그 자체로 근사한 맛을 보여줍니다만, 향 좋은 나무로 잘 훈연하면 풍미가 배가 됩니다. 좋은 펜 한 자루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게 맞습니다만, 속 깊은 이야기로 적셔지면 더 귀해집니다.
아버지가 사위에게 줄 수 있는, 이보다 더 근사한 선물이 또 있을까요? 만년필이 써지게끔 수리하는 데 든 것보다, 외관 복원에 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융 한 장을 다 쓸 정도로 많은 검정이 묻어났습니다. 흰 융이 검게 변해갈수록, 먹빛이던 펜에 조금씩 생기가 돕니다.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세상에 오직 단 한 자루뿐인, 뭣과도 바꿀 수 없는 펜을 살려내는 일이니까요.
▲파카75 세척융
김덕래
선물용 케이스에 병잉크를 같이 담아 보내드렸고, 한 달 뒤 전화가 왔습니다.
▲파카75와 병잉크 케이스
김덕래
결혼식 잘 끝내고 손편지 한 장 넣어 사위 손에 쥐어 줬는데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던지 아주 뿌듯하더라는. 덕분에 사위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고맙단 반가운 말씀.
연필, 볼펜, 샤프, 수성펜 등등 다양한 쓸 것이 있지만, 만년필만큼 내 마음을 담아 건네주기 좋은 필기구가 또 있을까요? 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파카(PARKER)
- 1888년 미국, 조지 섀포드 파카(George Safford Parker)에 의해 탄생한 가장 전통있는 필기구 생산업체 중 하나.
- 청록파 서정시인 박목월, 소설가 박완서, 조정래 등 많은 작가들이 즐겨 사용한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만년필 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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