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여순 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아버지는 여순사건으로 한국전쟁 직후에 학살되고, 어머니는 개가한 상황에서 김상수가 의지할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뿐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남의 집 날품팔이를 해서 그날그날을 연명했지만, 그 일도 매일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상수는 제 나이가 되어서도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상수와 딴 세상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수는 남들보다 2년 늦은 10살에 전남 여천군 삼일면 상암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니 그에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자유는 사치였다. 막내삼촌이 군대를 가면서 초등학교 학비를 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작파했다.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그때부터 김상수의 '하류인생'이 본격화되었다.
▲증언자 김상수
박만순
10대 때 남의 집 머슴 일을 시작했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걸었던 갈치잡이 배도 탔다. 세상에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20대 후반인 1972년부터는 육지생활을 시작했다. 한 정유회사에서 경비원으로 7년 7개월 일했다.
40대에는 밑천 들지 않는 장사를 했다. 리어카에 수박을 싣고 여수 서시장으로 가 노점상을 했다. 노점상은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점 단속반이 수시로 뜨면 정신없이 도망가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수 없기에 새로운 직업을 선택했다.
그가 뒤늦게 선택한 직업은 목수였다. 목수 역시 안정적인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류인생의 비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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