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04 07:49최종 업데이트 19.09.04 07:49
저널리스트로 평생을 살아 온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오늘부터 격주 수요일 '정연주의 한국언론 묵시록'으로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는 한국 언론에 대한 고발의 글이자, 몸으로 경험한 '한국 언론 50년의 역사'다.[편집자말]
 
2012년 1월 10일,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책 <정연주의 증언> 출판 기념 저자와의 대화 '이명박 정권은 왜 정연주를 제거하려 했는가?'가 열리고 있다.권우성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할까?"

요즘 스스로에게 종종 물어보는 질문이다. 1970년 동아일보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니, 햇수로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때로는 제도언론 안에서, 때로는 제도언론 밖에 있으면서 늘 '언론'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이 나이에 이르니 평생의 화두였던 '언론'에 근본 물음을 던지게 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한 자기 직업에 긍지를 갖기 마련이고, 그것을 하늘의 부름, 소명, 천직이라 여긴다. 나도 꽤 오랜 세월 동안 기자라는 업을 그리 여겼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모든 언론에 재갈을 물렸던 1970년대 그 암흑시대에도, 1975년 봄에 자유언론을 위해 싸우다 유신 정권과 야합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에 의해 동료·선배들 113명과 함께 무더기로 축출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펜을 빼앗기고 허허벌판에서 민주주의, 그 민주주의의 바탕이라 믿어온 언론자유를 근원적으로 압살하는 거대 권력과 싸우다 감옥 가고, 수배되어 도망 다니던 그 고통의 시간에도 기자라는 걸 천직으로 여기며 언젠가 내 손에 다시 펜이 쥐어지는 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6월 항쟁의 승리로 한겨레신문이 탄생하여 꿈에도 그리던 펜이 내 손에 다시 주어졌다. 11년 동안의 워싱턴 특파원 시절, 2000년 귀국하여 2003년 3월 한겨레를 떠날 때까지 재임했던 논설주간 시절, 돌아온 그 언론 현장에서 나는 참 행복했다.

2003년 봄, 한겨레신문을 떠났다. 한겨레 창간의 한 주축이던 동아투위(1975년 3월 동아일보사 해직 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위원회 약칭) 세대가 젊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한겨레를 떠나고 얼마 뒤 '개혁적 KBS 사장 선임을 위한 시민사회단체·노동조합 공동추천위'에 의해 사장 후보 3인 중 한 명으로 추천되었고, 이들 3인을 포함, 자천 타천의 사장 후보 30여 명을 두고 진행된 KBS 이사회 사장 선임 최종투표에서 5 대 4, 1표 차이로 선임되었다 (KBS 사장은 이사회에서 선임·제청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후 2008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검찰, 감사원, 방송통신위원회, 국세청 등의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나를 해임할 때까지 5년 4개월 동안 재임했다. 그 기간 동안 KBS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엇갈리겠지만, KBS가 신뢰도 1위, 영향력 1위의 자리에 오른 성취는 객관적 사실이다.

당시 직접 기사를 쓰거나 프로그램을 제작하지는 않았으나, 후배들이 보도와 제작 현장에서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여건과 분위기를 만드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보람된 세월이었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여겼던 시절이다.

그 뒤 서초동 법원을 드나들면서 사법 고문이라 느껴졌던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방송의 독립 등 언론 문제를 늘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재단과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공동조사한 2018년도 언론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37개국 중 꼴지였다.디지털뉴스 리포트 2018

'다시 태어나도 기자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나는 짙은 회의에 빠지면서 천직이라 여겼던 자긍심도, 열정도 크게 식어버렸음을 느낀다. 노무현 대통령의 그 비극적 죽음,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치검찰과 언론이 저질렀던 죄악을 보면서 언론이 집단적으로 포악해진 모습을 목격했다. 그때 언론은 국민적 슬픔 앞에 잠시 참회하는 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의 생명과도 같은 믿음, 신뢰가 이렇게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심하게 오염된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무책임하고, 부끄러움 모르는, 심지어 난폭하기까지 한 오만한 '권력 집단'이 되어 본 적이 있었던가.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영국 옥스퍼드대학 부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공동 조사한 2018년도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37개국 중 꼴찌였다. 2017년 조사에서도 꼴찌였다. 이 조사에서 뉴스를 신뢰한다는 비율이 한국의 경우 2017년 23%, 2018년 25%에 지나지 않았다.

혹자는 사실보도 자체를 할 수 없었던 유신 독재, 군부 독재 시절의 한국 언론 신뢰도가 바닥이 아니었겠는가는 질문을 할지 모르겠다.

당시 언론의 암흑 상황은 독재 권력의 폭압이라는 외부요인이 결정적이었고, 언론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는 아니었다. 폭압의 권력이 무너지면 암흑의 세상은 햇볕 가득한 밝은 세상으로 바뀌고, 언론은 제 기능을 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지금 한국 언론의 상황은 다르다. 언론 내부의 적극적인 행위가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고, 악취가 풍기는 오염된 언론 상황으로 만들었다.

생명과 영혼이 증발한 한국 언론  

언론의 생명과 영혼이 증발해버린 황폐한 언론 토양. 그게 지금 한국 언론의 모습이다. 그 황폐해진 언론 토양에서 기자를 칭하는 '기레기'라는 치욕스러운 호칭은 이제 보통명사가 되었다.

증오와 저주의 마음이 없고서야 어찌 이런 기사와 칼럼, 사설이 가능할까 싶은 글들이 지면을 채운다. 때로 집단의 비이성적 분위기에 휘말리는 상황이 되면 팩트, 진실, 공정성, 정직성 등 저널리즘의 기본은 사라지고, 의혹만의 기사, 센세이셔널리즘의 어뷰징 기사들이 난무한다.

눈길 끌려고 '속보', '단독'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이는 행태는 오염된 황색 저널리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족벌언론 등 회사 단위의 언론 '조직'이 '회사 이익, 내부 방침'의 이름 아래 왜곡·편향을 강제하기도 한다.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은 그의 칼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에서 "기자들은 알권리·사실 보도 같은 가치와 회사 이익·내부 방침 같은 조직논리 중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5대 5?' '6대4?' '3대7?' 아, 비중으로 이야기하지 말자. 그러는 순간, 기자들이 내세우는 가치는 죽는다"고 했다. 회사의 이익, 내부 방침 같은 '조직' 논리의 현실을 토로한 셈이다.

저질과 오염의 악취가 풍기는 종편, 케이블 채널의 생태계에서 그나마 상대적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어야 할 공영방송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너무 망가져 버렸고, 무섭게 바뀌어버린 방송환경, 언론환경에서 공룡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진입장벽 없이 누구나 '미디어'를 만들 수 있는, 그래서 아주 손쉽게 무제한의 '일방적 얘기'를 쏟아내는 디지털 시대의 SNS, 유튜브 등 '새 매체'에는 가짜뉴스, 왜곡, 혐오, 증오가 넘쳐난다.
 
7월 12일, 고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관련 왜곡, 은폐, 축소 수사를 규탄하고 실체적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제1차 페미시국광장 - 시위는 당겨졌다. 시작은 조선일보다'에 등장한 빔프로젝트 구호.권우성

신뢰는 바닥, 상황은 종말적인데 망하는 언론사가 없다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토양은 추악하게 오염된 이 한국 언론을 보면 분명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려운 위기이며, 상황은 종말적이다. 그런데도 망하는 언론사가 없다. 광고와 협찬이 반 시장, 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괴이하게 할당되고, 포털에 기생하여 어뷰징 기사로 클릭 장사를 하는 등의 비정상이 빚어낸 한국 언론의 불가사의다.

만약 언론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래서 그런 언론사가 독자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실제 문을 닫는 일이 발생한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막무가내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종편이 시작될 무렵, '종편은 곧 망한다'는 필망론을 여러차례 글로 쓰고, 강연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망한 종편이 하나도 없으니, 독자와 청중을 오도한 셈이다. 나의 '예측 능력'이 모자랐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종편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 이명박· 박근혜 정권 동안 종편에 주어진 온갖 특혜들, 그 특혜 구조가 여전히 온존하는 지금의 방송법 비대칭 규제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국 언론의 어제와 오늘을 보면, 이게 어디 정상인가 싶은 일들이 너무도 많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경험해 온 한국 언론 이야기를 이제 기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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