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습격사건이 보도된 빨치산 신문. 한림대학교, 빨치산자료집 7
박만순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김영환(당시 7세)은 서당에서 큰 목소리로 천자문을 외웠다. 열려진 문으로 빨치산이 따발총을 메고 골목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모였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마루에 걸터앉은 빨치산은 김영환에게 "얘, 이리 와서 글 읽어 봐라"라고 했다. 배운 천자문을 술술 외우니, 빨치산은 "그놈 참 기특하네. 공부 열심히 하거라"며 김영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은 집 주인인 서당훈장에게 옷을 있는 대로 달라고 했다. 무슨 해꼬지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훈장은 안심하고 옷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그렇게 서당에서 옷을 얻은 빨치산 십여 명은 새터에 보초 한 명을 세우고 아랫마을인 보도막골로 내려갔다. 훈장은 아이들에게 "얼른 집으로 가거라"고 했지만, 관심이 동한 소년 김영환은 멀찍이서 빨치산을 따라갔다. 그들은 보도막골 이장집으로 가서 옷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이장은 또랑을 따라 미원지서로 내달렸다. 이장이 미원지서에 신고하러 가는 것을 눈치 챈 그들은 이장 집을 불 질렀다. 1951년 5월 27일, 빨치산 이동루트의 주요길목인 미원면 대신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대신리에 와서 민간인복을 빼앗아간 이들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부대의 유격대원이었다.
청주시 동공원에 집결한 부대원들이 숨소리를 죽였다. 1951년 5월 20일 속리산을 출발해, 청주에서 10km 떨어진 가래산(청원군 가덕면)에 도착한 것은 5월 23일이었다. 청주시 한가운데 있는 동공원에 도착한 것은 5월 26일 새벽 1시였다. 옷은 보슬비로 흠뻑 젖었다. 새벽 1시 45분 '투두두'하는 기관총소리를 신호로 유격대원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청주해방작전' 이었다.
유격대원 약 180명은 3개 소부대로 나뉘어 공격했다. 남부군 승리사단이 감행한 이날의 공격은 정치주임 김갑제의 지휘 아래 김흥복 부대장과 송관일 부대장의 현장지휘로 이루어졌다. 청주역, 청주형무소, 충북도청을 주요 공격지점으로 잡은 유격대원들은 청주방송국, 청주경찰서, CIC 사무실 등을 공격했다. 주요 관공서가 파괴되고, 방화되었다.
특히 김흥복 부대 박원길 분대장은 청주형무소를 공격해 사상범 전원을 석방시켰다. 형무소에서 나온 좌익수 140여 명이 빨치산대오를 뒤따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형무소생활에 허약해진 이들이 날다람쥐 같은 빨치산을 뒤쫓아 가기에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남로당 괴산군당 선전부장을 맡았던 김종한을 비롯한 수십 명이 빨치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지섭(여) 순경(보안과), 오선표 순경과 도청 공무원 1명이 사망했다. 새벽 3시 30분 철수를 시작한 유격대원들은 미원을 경유해 속리산으로 퇴각했다.
한국전쟁기에 지리산, 덕유산, 신불산, 대둔산 등 전국 산악지역에서 유격대활동을 했던 빨치산들은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투쟁성과는 미미했다. 군·경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이른바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 게 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약 1시간 30분에 불과했지만, 유격대가 도청소재지를 공격한 것은 한국전쟁기 빨치산투쟁 중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1951년 6월 6일 속리산에서 '청주해방투쟁 기념 경축대회'를 열었다. 반원형 야외무대에는 김일성·스탈린 초상화가 걸렸고, 김흥복, 송관일 부대의 경과보고와 연예대회가 진행되었다.(한림대학교 <빨치산자료집 4, 7>, 홍두표 <나의 여운>, 전창식 <5·26 청주피습사건전말>, 충북지방경찰청 <충북경찰사>)
즉, 이현상부대가 청주시를 습격한 다음 날 퇴각하면서 미원면 대신리에 들어와 민간인 옷을 구하려 한 것이다. 이 와중에 보도막골 이장집이 불에 타버렸다. 이 사건 외에도 인근 야산의 비트(비밀아지트)가 880부대에 의해 발각된 사건이 있었고, 크고 작은 유사사건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