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 서화 가게가 자리 잡히자 작품을 단장하는 표구사도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
연합뉴스
광통교는 도성에서 축조된 다리 중 가장 큰 돌다리이다. 당시 한양은 조선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각종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중심이 '운종가(雲從街)' 곧 지금의 종로로 대표적인 상가 지역이었다. 사실 운종가란 이름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종가는 지금의 광화문 우체국 동쪽으로부터 종로 3가까지였으나, 점차 규모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안국동까지 확대되었다.
광통교는 넓다는 의미로 '광교(廣橋)'라 부르기도 했고, 도성 내 6번째 다리라고 하여 '육교(六橋)'라고도 불렀다. 광통교 위쪽으로는 무명을 파는 '백목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면화를 파는 '면자전', 잡화점인 '동상전', 무시나 베를 파는 '포전', 마구를 파는 '마상전'이 늘어서 있었다.
아래쪽에는 칠기를 파는 '칠목기전', 가발 등을 파는 '월외전' 등이 있었다. 이렇듯 번화한 사이에 자리 잡은 도화서는 혜민서, 장악원 등과 함께 광통교의 번성을 주도하였다. 광통교 북쪽으로는 시전 상인이 살았고, 남쪽으로는 화원이나 의원 그리고 역관 등 기술직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도화서 화원들이 궁궐 외에 주문을 맡은 양반 고객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에 있거나 왕실과 관련 있는 특별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촌(北村)'에 살았다. 당시 북촌에는 벌열 양반과 왕의 인척들이 사는 조선조 최고의 부촌이었다. 그러니 화원들의 후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촌 지역에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화원들의 입장에서 도화서가 있는 곳은 궁중에서 멀지 않고, 서화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들이 광통교에 있었고, 자신들의 후원자가 사는 북촌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좋은 곳이었다. 이 세 곳이 모두 연결되는 중심부가 인사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입지는 후에 인사동이 서화와 전적, 고미술 거래의 중심지가 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인사동이 본격적으로 서화 골동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인사동이라는 지명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들어졌다. 인사(仁寺)란 지명은 '관인방'과 '대사동'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이미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상업에 눈을 뜬 일본인 상인들은 인사동이 서화골동 유통의 최적지라는 것을 알고 이곳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광통교, 경복궁과 창덕궁, 북촌으로 연결되는 인사동은 이후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인사동은 이때 이후 한국 미술품 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강화되자 더욱 많은 일본인 서화골동 상인들이 인사동에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 남산 바로 아래에 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가 있어 인사동은 미술품을 움직이는데 최혜의 적지였다. 유명한 미술품 수장가인 간송(澗松) 전형필(全瑩弼, 1906-1962) 등 서화 애호가들은 인사동과 경성미술구락부를 오가며 수집품을 채워나갔다.
서화 가게가 자리 잡히자 작품을 단장하는 표구사도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에 '표구(表具)'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여 미술과 관련된 교유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갖추어지자 인사동은 명실상부한 서화골동의 산실이 되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