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12 08:23최종 업데이트 19.04.12 08:23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으로부터 안전과 인생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자가 되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사과 없는 국가를 대신해 스스로 자신을 기념하는 '이상한 집'을 지으려 합니다. 그 이상한 집의 이름은 '수상한 집'. 지금 제주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편집자말]
2012년 겨울 제주시 화북의 어촌마을에서 김용담-김인근 부부를 처음 만났습니다. 다리가 불편해 혼자 일어서거나 앉지도 못하는 김용담씨를 늘 돕는 것은 그의 아내 김인근씨였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제대로 인사치레를 못한다며 김용담씨는 어려워했습니다.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내가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내도 연신 방이 누추하다며 미안해했습니다. 사실 이 부부와 강광보씨는 한마을에서 함께 살던 이웃이었습니다. 김용담씨와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이며, 김인근씨는 동네 누이였습니다. 이 부부를 알게 된 것도 강광보씨의 소개 덕분이었습니다.

몰살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4.3 희생자들의 모습을 한 시민들 403명이 4.3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4.3 대한민국을 외치다’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2018.04.03 ⓒ 최윤석


이 부부의 사연이 기가 막혔습니다. 김인근씨는 4.3 당시 집안이 몰살되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1949년 초에 면에서 일하던 오빠가 산사람들한테 잡혀갔어요. 그게 화근이라. 토벌대 2연대 군인들이 화북에 쳐들어와서는 남자고 여자고 막 잡아서는 화북초등학교에 집결시켰어요."

김인근씨의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 2살, 4살 조카와 임신한 올케언니, 그리고 김인근씨도 잡혀갔습니다.

"화북초등학교에 가니 아버지는 벌써 얼마나 맞았는지 의식은 없고 눈알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고, 입이랑 코에서는 숨 쉴 때마다 피가 퍽퍽 나오는 거예요. 이미 아버지는 숨을 거두신 거나 마찬가지였죠."

산사람들에게 납치되어 행방을 모르는 오빠의 행적을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납치된 사람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니 빨갱이 가족이라며 총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당시 화북초등학교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모두 트럭에 태워 지금의 제주대학 쪽으로 데려가 실제로 총살했습니다.

다행히 김인근씨는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역시 총알을 7개나 맞고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러나 만삭의 올케와 조카들을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김인근씨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오시기는 했지만 몸에 총알구멍이 7개나 있더라고. 밤마다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어요. 사람이 그렇게 죽고 다쳐도 아무도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괜히 우리 집에 들락거렸다가 빨갱이로 몰릴까봐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날 아침 마당에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노란 호박 하나, 쇠고기 한 근, 쪽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호박으로 죽을 만들어 어머니를 드리고, 소고기는 얇게 포를 떠 상처에 싸매라고 써있었습니다. 그리고 쪽지의 마지막 말.

"어머니 말 잘 듣고 있거라. 뭐라도 (하고) 지내면 좋은 세상 올 것이니.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는 뜻의 제주 방언)."

김인근씨는 그 말을 붙잡고 살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돌보며 힘을 내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4.3의 망령은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늘 따라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인근 집안의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동네에 사는 아버지 친구분이 자기 아들과 맺어주기로 마음 먹고 혼인을 제안해 결국 김인근씨는 그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쪽지에 적힌 글 "살암시민 살아진다"
 

2012년 일본 오사카에서 휠체어를 타고 증인을 찾아다니는 김용담 ⓒ 지금여기에


그녀는 결혼식 전날 이름 모를 마을 사람들이 전해주었던 쪽지를 모두 태웠다고 합니다. 그 쪽지를 태우면 4.3의 악몽이 떠나리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막 후회가 돼요. 그 쪽지 부여잡고 살았는데 왜 그걸 태웠는지. 그거 태우면 4.3이 막 없어지리라 생각했거든. 근데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 막 생각나더라고."

그녀의 악몽은 결혼 후 남편 김용담씨가 간첩으로 몰리면서 또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해방 후 어려웠던 제주의 경제사정으로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밀항을 했습니다. 김용담씨도 어려운 생활 형편 탓에 1964년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재일교포 강봉웅이라는 사람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어느 날 일본 경찰의 불심 검문에 걸려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끌려가게 되었고, 1967년 1월 제주로 강제송환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난 어느 날.

"1971년에 덩치 큰 남자 셋이 찾아왔어요. 시커먼 지프에 나를 던지듯이 싣고는 가는데 가보니까 제주 보안대더라고. 막무가내로 때리면서 일본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누구를 만났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제대로 말을 안 한다고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는 허벅지를 잘근잘근 밟는데 그때 이 무릎이 빠져서 망가졌어요."

아는 게 없으니 자백할 것도 없었던 김용담씨에게 수사관들은 전기고문까지 자행했습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신을 죽이라며 수사관에게 달려들었다가 기절할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것으로 또 하나의 'Made in Southkorea' 간첩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쪽지를 태웠더니 '조작 간첩'이 찾아왔다
  

김용담의 피해 진술서. 고문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 ⓒ 지금여기에


그는 시민단체 '지금여기에'의 도움으로 2014년 3월 광주고등법원에서 재심 결정, 같은 해 5월 같은 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김용담씨는 그때의 전기 고문 후유증으로 걷는 것은 물론이고 전기제품도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무죄 판결 후 김인근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편 일이 다 저 때문인 것만 같아서 수십년간 제 속이 까맣게 탔어요. 남편 무죄받은 게 저 무죄받은 것만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그녀는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주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들어줍니까? 어디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선생님들이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지요. 이야기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기념관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그래도 광보네 집에 기념관 짓는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어디 써 붙일 수나 있나요? 그런데 광보가 그걸 한다니 참 좋지 않습니까? 거기 생기면 마음껏 가서 떠들어야지." ([관련기사] 우리 집에 지을까?" 이 한마디에 수상한 집이 시작됐다)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의학적 치료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치유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가 그들을 더 이상 범죄자로 보지 않고, 색깔로 가르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더 많은 피해자의 이야기가 기록되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수상한 집'은 그런 일을 하겠습니다.
 

2014년 광주고법에서 무죄를 확정받고 난 뒤 김용담 김인근 가족이 건배를 하고 있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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