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무 <흐린 달밤>. 조선미전 도록 재촬영.
황정수
1922년이 되어서야 서울로 올라와 제2회 서화협회전에 회원으로 참가하고,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에 <흐린 달밤>이라는 산수화를 출품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게 될 쯤인 1923년, 상해에 있을때 임시정부 요인과 만났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일제의 압박이 들어온다. 그는 서울을 떠나 간도의 용정과 연길로 가서 한동안 머물며 한인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기도 한다.
1925년 다시 간도에서 서울로 돌아와 그동안 중단하였던 그림을 다시 시작한다. 1926년에는 제5회 조선미전에 참가하여 산수화 <유곡(幽谷)의 가을>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한다. 이어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제6·7·8·9·10회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1931년 제11회 서화협회전에도 출품한다. 이와 같이 박승무는 한동안 꾸준히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1932년부터는 전람회에 환멸을 느끼고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박승무의 야인작가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1944년 서울을 떠나 가평의 송씨 댁에서 피신생활을 한다. 그렇게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나날을 지내던 그는 1945년 신문기사를 통하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해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광복 이후 중앙 화단에서 물러나 은둔적 생활을 즐기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한다. 작품 활동이 많아지자 그는 서울 창덕궁 옆 원서동에 집을 마련하여 거주하기 시작한다.
박승무의 대전 정착
박승무는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여행을 거쳐 가평,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였지만 훗날 충청지역 대전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보통 박승무를 '대전 지역의 대표작가'라 하는데, 그가 대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7년부터이다. 그는 6·25전쟁 동안 목포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데 마침 목포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중 중간 기착지인 대전에 하차하면서 대전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기차가 서울에 직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에서 짐을 부치고 다시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목포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일은행 지점장을 우연히 만난다. 그런데 갑작스레 지점장은 대전에 정착하기를 권유한다. 박승무는 마침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던 차에 큰 결심을 한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전에 정착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그는 1958년 서울 원서동의 집을 처분하고, 대전에 집을 마련하여 제2의 고향으로 삼는다. 이때가 그의 나이 65세였다. 늦은 나이에 맞은 객지 생활이지만 야인 기질이 강했던 박승무에게 대전 생활은 그런대로 지낼 만 하였다. 박승무는 대전 대흥동을 생활 근거지로 하여 지내면서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로 말년을 보낸다. 말 그대로 충청화단의 어른이 되었다. 그러다 1980년 7월, 87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다.
비록 늦은 나이에 정착하였지만 22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을 대전에서 생활하였으니 대전 지역 화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개인전을 여는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대전지역의 미술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충청화단의 어른이었다.
박승무의 초기 작품 경향

▲ 박승무 <화조화>. <100인선집 박승무편>(금성출판사, 1977)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
문선호
박승무의 초기 작업은 서화미술회에서 학습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산수화, 화조화 등 각 분야의 그림에 모두 능했지만, 스승인 안중식과 조석진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림을 그렸다. 화조화나 사군자 모두 스승들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산수화 또한 스승들의 그림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품성이 단정하고 모범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그림 또한 스승들이 전해준 화풍에 몰입하여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박승무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화가가 아니라 진득하게 노력하는 성격의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화조화나 사군자는 장승업이나 안중식 등 타고난 재능을 가진 화가들의 그림과는 달리 예리하고 세련된 맛이 적고,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처음 보았을 때에 자극적인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으나, 오래 두고 보면 점차 정이 들어 친숙해지는 특징이 있다. 산수화에서 특히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러한 화풍이 형성된 것은 재기 넘치는 안중식보다는 무디지만 진득한 조석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박승무의 특장 설경산수

▲박승무 <설경산수>. <100인선집 박승무편>(금성출판사, 1977)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
문선호
서화미술회 출신 화가들은 졸업 후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통하여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들로 성장한다. 그러면서 각각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며 자신의 존재를 세워나간다. 박승무 또한 많은 고심을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 내용이 그의 독특한 장기인 '눈 내린 풍경을 그린 산수화'이다. 이러한 그의 설경산수는 매우 인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특히 1971년 6대가전 이후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해진다. 고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승무의 그림 중에는 설경산수만을 찾았고, 그는 그에 맞추어 많은 산수화를 그렸다.
설경산수화에 고정된 박승무의 이러한 전형성은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경제적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화가로서는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모색하는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대전이라는 지역에 묻혀 운둔하듯이 살아 중앙화단과의 교섭도 적어 화가로서 많은 자극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점차 그의 화풍은 설경산수에 매몰되어 더 이상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겨우 지역의 대표화가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간혹 중앙화단의 일에 관여하는 정도의 활동이 그의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설경산수'라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의 화풍은 더 이상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지 못하고 만다. 게다가 한 지역 화단의 어른으로서 살아온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지도 못하여 제대로 자신의 화풍이 이어지지도 못한다. 여기에 자신의 그림 또한 정체되어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긋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더라도 박승무는 근대기 한국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일 뿐만 아니라 충청 지역 화단의 명맥을 이어온 화가로서의 역할이 적다곤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박승무라는 화가에 대해 다시금 회고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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