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14 08:47최종 업데이트 19.02.14 08:47
조선 왕조가 저물고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한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한국 근대 서양화 화단도 시작된다. 유럽과 미국의 화가들이 들어와 고종의 초상을 그리는 등 미술활동을 하였지만, 본격적으로 서양화단이 형성된 것은 일본인들에 의해서이다.

당시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 미술을 받아들여 그들 특유의 근대미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능력 있는 자국의 미술인들에게 유럽이나 미국에 유학하기를 권장하였다. 특히 프랑스에서 공부한 화가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통하여 인상파 미술이 유입되어 일본 서양화풍의 주류를 이루었다. 공부가 끝난 화가들은 고국에 돌아와 도쿄미술학교 등 명문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일본 화단의 중심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1909년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한국인 최초로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면서 한국의 서양화단이 시작된다. 이후 김관호, 김찬영이 계속해서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이들 세 명은 한국 근대 서양화단을 개척한 3인방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에 돌아와 처음에는 서양화를 그리며 보급에 힘쓰지만, 곧 현실의 장벽에 막혀 작업을 그만둔다. 이들은 서양화단 개척기에 많은 공이 있지만, 작가로서는 성공한 이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들에 뒤이어 일본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와 평생 화가로 사는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9)과 설초(雪蕉) 이종우(李種禹, 1899-1981)가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라 할 만하다.

도쿄 유학 시절
 

이종우. ⓒ 설초 이종우 화집

 
이종우는 황해도 봉산에서 부유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다. 문중에서 세운 조양학교를 나와 평양으로 가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닌다. 여기에서 일본인 미술교사인 후카미 요시오(深水良雄)의 지도를 받아 수채화를 배운다. 이때 그린 작품을 공진회에 출품하여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과 함께 모란봉에 그림을 그리러 갔다가 특별한 광경을 마주하며 화가로서 평생을 살 것을 결심하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다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가 유채로 모란봉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동양화와는 판이하게 다른 유화를 그리는 모습을 보며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그의 눈에는 실제 모란봉보다 그림 속의 모란봉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이종우는 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집안의 분위기는 미술을 공부한다면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집에 법률학을 공부한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유학에 대한 부모의 승낙을 받는다.

1917년 도쿄로 건너간 그는 부모의 뜻과는 달리 법과가 아닌 미술학교에 입학하기를 서두른다. 그러나 입학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약 일 년간 교토에 있는 간사이미술연구소에서 입학에 필요한 데생과 기초 공부를 한다. 한 해 후인 1918년, 드디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러한 법학 대신 미술학교를 다니는 거짓 행동은 3학년까지 지속되다 들통이 나고 만다.

그는 도쿄미술학교에서 나가오카 코타로(長岡孝太郞), 고바야시 만고(小林萬吾),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郞助) 등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특히 오카다 사부로스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카다 사부로스케는 자연주의 화풍의 탐미적인 미학을 주창한 화가였는데, 그의 감각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은 이종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종우는 체질적으로 구조적인 형태보다는 정감적인 색채에 동감하기 쉬운 성격이었기에 더욱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재학 중 빼어난 능력을 보인 이종우는 1921년 일본평화박람회 양화부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을 하기도 한다. 

1923년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종우는 귀국하여 경성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미술교사로 취임한다. 1924년에 조선미술전람회(이후 조선미전)에 <추억>이란 작품과 <자화상>이란 작품을 출품하여 <추억>이 3등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는 조선미전에 출품하지 않는다. 조선미전이 지니는 식민지 정책의 본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하기 시작한다. 서화협회는 고보를 다닌 평양 출신인 윤영기가 창설하였고,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어서 운영한 한국인이 운영한 단체라는 영향이 크다. 또한 당시 도쿄미술학교 출신들이 총독부가 주관하는 관전에 출품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두 번째 유학
 

파리 유학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종우. ⓒ 설초 이종우 화집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종우는 1925년에 다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한국인 화가로서 파리에 유학하는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술회하기를 "절실한 미술에 대한 욕구와 집착이 있어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단지 부잣집 아들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본인 스스로 겸손한 태도를 보인 것일 뿐, 사실은 미술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했을 것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짓말을 해가며 법률 대신 미술을 전공한 이종우가 아니었던가? 이종우는 파리에 도착하여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기 위해 불어를 배우러 다닌다. 불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무슈 개랑' 미술연구소와 '무슈 슈하이에프'에 다니며 미술공부를 한다. 

1927년에는 살롱 도톤느에 <모부인상>과 <인형이 있는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을 한다. 한국인 최초의 입선이었다. 살롱 도톤느는 앙리 마티스나 후지타 쓰구하루 같은 유명한 화가들도 참여하여 활동한 유명한 미술전람회였다.
 

이종우 <모부인상>. ⓒ 설초 이종우 화집

 
<모부인상>은 파리에서 같이 미술 공부하던 친구의 부인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 친구는 백계 러시아인이었는데, 어렵게 생활하는 터라 이종우와 같이 자기 부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모부인상>은 이때 그린 것이다. 다른 그림에 비해 표현이 한층 무르익은 경지를 보여준다. 치밀하고도 박진감 있는 표현은 유럽 고전 미술 기법을 연구한 흔적이 가득하다. 한 인물을 소재로 그린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종우의 학습 수준과 세련된 필치를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이종우 <인형이 있는 정물> ⓒ 설초 이종우 화집

 
<인형이 있는 정물>은 화실의 탁상에 있는 녹색 화병에 꽂혀 있는 하얀 꽃과 백색 푼주에 담은 연꽃을 앞부분에 배치하였다. 화면 중앙에 하얀 옷을 입은 신부인형을 담은 유리 상자를 배치하고, 왼쪽 위쪽으로는 벽걸이 장식품이 걸려 있는 내용의 작품이다. 각 사물간의 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배치한 실력이 눈에 띈다. 또한 녹색과 흰색의 대비에서 오는 신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성과 기교가 어우러져 높은 격조를 보이는 좋은 작품이다.

이종우의 파리 생활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풍족하고 순조로웠다. 집에서 부쳐주는 많은 학비가 끊이지 않아 고급 술집에서 밤새도록 코냑을 마실 정도였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파리 유학생의 집합소가 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이곳에 모여 고깃국을 끓여 먹곤 하였다. 당시 파리에는 27명의 한국 유학생이 있었는데, 대개는 학비 조달이 어려웠다. 겨우 몇 사람만이 집에서 풍족하게 학비가 왔다. 그러니 이종우는 한국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한 유학 생활을 한 인물이었다.

귀국

3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1928년 돌아온 이종우는 <동아일보> 주최로 귀국 개인전을 연다. 이때 30여 점이 출품 되는데, 살롱 도톤느에서 입선한 작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이때 출품된 <모부인상>은 김성수의 동생으로 경성방직을 경영하던 김년수(金秊洙, 1896-1979)가 샀다고 한다. 중앙고보 교사로 있었던 인연으로 구입한 듯하다. 1929년에는 다시 중앙고보의 교사로 취임한다. 이 자리는 도쿄미술학교 선배인 고희동으로부터 물려받은 자리였다. 교사 생활은 1950년까지 이어진다.

1930년대 당시 중앙고보에는 어느 학교에도 없는 그럴 듯한 아뜰리에가 있었다. 이는 고희동이 김성수에게 미술연구를 위해 설치해 달라고 부탁해 설치한 것이다. 이곳에 휘문고보 학생이던 이마동이 드나들며 열심히 서양화를 그렸고, 김용준, 길진섭, 김종태, 구본웅 등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미술을 좋아하여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이종우가 지도하는 중앙고보의 화실을 매우 동경하였다. 중앙고보생 김용준이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여 화제가 된 <동십자각>이 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마동, 김용준 등 젊은 학생들이 순조롭게 그림을 그리고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종우의 도움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절 이종우의 작품은 확실히 파리 시절 작품에 비해 필력이 쇠퇴하고 관찰력이 평이해진 느낌이다. 파리 시절의 감각적인 필치가 무뎌지고, 구성 등에서 안이한 태도로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부인초상> 같은 작품에서도 <모부인상>에서 보이는 긴장감이 없고, 다른 여러 그림도 파리 시절의 솜씨와 비교하긴 어렵다. 
 

이종우 <청전 초상> ⓒ 설초 이종우 화집

 
이 때의 작품 중에 <청전 초상>이란 작품이 있다. 당시 유명한 동양화가였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을 그린 것이다. 그가 이상범의 초상을 그린 것은 같은 화단에 소속된 동료라는 의식도 있지만, 자신과 함께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종우는 서촌 입구 사직동에 살았고, 이상범은 조금 더 들어가 누하동에 살았다. 걸어서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살았던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지냈다.

이런 친분이 있어서인지 작품 속 이상범의 모습이 실제 인물을 보는 듯하다. 구성도 볼 만하고 표현도 자연스럽다. 해방이 된 이후 좌우의 대립이 심해지자 이종우는 학교생활 외에 다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간혹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곧 국전에 출품할 작품을 할 뿐이었다.

말년은 산에서

195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창설되자 이종우는 교수로 취임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실질적인 교육과 화가로서의 활동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제2회 국전 심사위원장이 된다. 이젠 명실상부한 화단의 원로가 된 것이다. 이후 지속해서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그는 여러 갈래의 작품을 다 잘 그렸는데, 특히 풍경이나 정물 등을 인상파 기법으로 잘 그렸다. 
 

이종우 <아침> ⓒ 황정수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중에 특별한 것으로 1957년 제6회 국전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한 <아침>이란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노년에 들어가며 무르익어 가는 이종우의 미술에 대한 원숙한 해석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이른 아침 이슬 내린 정원의 신선한 공기가 잘 드러나 있다. 자유로운 형태를 보이는 조선백자는 결백한 이종우의 심성을 보는 듯하고, 난초 등 푸른 풀들은 시들지 않는 화가 이종우의 화가로서의 푸른 에너지를 보는 듯하다. 구성, 색감, 필치 등 어느 하나 손색없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전에 출품된 후 행방이 잊혀 있었다. 그런데 2016년 어느 날 느닷없이 한 경매회사에 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출품자는 5.16 주체 세력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김종필'이었다. 이 작품이 어떻게 해서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작품 뒷면을 보았다. 그랬더니 하얀 조그만 종이에 '총리공관'이란 말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총리 공관에 걸려 있던 작품이란 뜻이다. 어찌된 일일까?

김종필씨가 국무총리를 한 시절은 1971년에서 1975년까지 4년간이다. 마침 이 기간에 속하는 1974년에 발간된 이종우의 도록이 있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27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소장처가 어디인가를 살펴보니 '김종필 소장'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본래 김종필 소장이었다는 의미이다. 총리가 되자 자신의 소장품을 가져다 걸었다가, 총리를 그만두며 다시 집으로 가져 왔다는 의미가 된다. 재미있는 작품 수장 흐름이다. 

이종우는 말년에 북한산 자락에 화실을 내고 북한산과 도봉산의 사계절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마치 말년을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싶어 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도 조선조 문인화처럼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이때 그린 그의 작품은 서양화라기보다는 한 폭의 수묵산수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때의 작품들이 인상파 기법을 기조로 하여 유사한 소재를 반복하였고, 작품도 뛰어난 감성을 보여주지 못한 한계에 있다는 점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한 화가가 평생토록 늘 좋은 그림만을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