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인형이 있는 정물>
설초 이종우 화집
<인형이 있는 정물>은 화실의 탁상에 있는 녹색 화병에 꽂혀 있는 하얀 꽃과 백색 푼주에 담은 연꽃을 앞부분에 배치하였다. 화면 중앙에 하얀 옷을 입은 신부인형을 담은 유리 상자를 배치하고, 왼쪽 위쪽으로는 벽걸이 장식품이 걸려 있는 내용의 작품이다. 각 사물간의 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배치한 실력이 눈에 띈다. 또한 녹색과 흰색의 대비에서 오는 신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성과 기교가 어우러져 높은 격조를 보이는 좋은 작품이다.
이종우의 파리 생활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풍족하고 순조로웠다. 집에서 부쳐주는 많은 학비가 끊이지 않아 고급 술집에서 밤새도록 코냑을 마실 정도였다. 그래서 그의 집은 늘 파리 유학생의 집합소가 되었다. 일요일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이곳에 모여 고깃국을 끓여 먹곤 하였다. 당시 파리에는 27명의 한국 유학생이 있었는데, 대개는 학비 조달이 어려웠다. 겨우 몇 사람만이 집에서 풍족하게 학비가 왔다. 그러니 이종우는 한국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편안한 유학 생활을 한 인물이었다.
귀국
3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1928년 돌아온 이종우는 <동아일보> 주최로 귀국 개인전을 연다. 이때 30여 점이 출품 되는데, 살롱 도톤느에서 입선한 작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이때 출품된 <모부인상>은 김성수의 동생으로 경성방직을 경영하던 김년수(金秊洙, 1896-1979)가 샀다고 한다. 중앙고보 교사로 있었던 인연으로 구입한 듯하다. 1929년에는 다시 중앙고보의 교사로 취임한다. 이 자리는 도쿄미술학교 선배인 고희동으로부터 물려받은 자리였다. 교사 생활은 1950년까지 이어진다.
1930년대 당시 중앙고보에는 어느 학교에도 없는 그럴 듯한 아뜰리에가 있었다. 이는 고희동이 김성수에게 미술연구를 위해 설치해 달라고 부탁해 설치한 것이다. 이곳에 휘문고보 학생이던 이마동이 드나들며 열심히 서양화를 그렸고, 김용준, 길진섭, 김종태, 구본웅 등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미술을 좋아하여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이종우가 지도하는 중앙고보의 화실을 매우 동경하였다. 중앙고보생 김용준이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여 화제가 된 <동십자각>이 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마동, 김용준 등 젊은 학생들이 순조롭게 그림을 그리고 화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종우의 도움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절 이종우의 작품은 확실히 파리 시절 작품에 비해 필력이 쇠퇴하고 관찰력이 평이해진 느낌이다. 파리 시절의 감각적인 필치가 무뎌지고, 구성 등에서 안이한 태도로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부인초상> 같은 작품에서도 <모부인상>에서 보이는 긴장감이 없고, 다른 여러 그림도 파리 시절의 솜씨와 비교하긴 어렵다.

▲이종우 <청전 초상>
설초 이종우 화집
이 때의 작품 중에 <청전 초상>이란 작품이 있다. 당시 유명한 동양화가였던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을 그린 것이다. 그가 이상범의 초상을 그린 것은 같은 화단에 소속된 동료라는 의식도 있지만, 자신과 함께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다. 이종우는 서촌 입구 사직동에 살았고, 이상범은 조금 더 들어가 누하동에 살았다. 걸어서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살았던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지냈다.
이런 친분이 있어서인지 작품 속 이상범의 모습이 실제 인물을 보는 듯하다. 구성도 볼 만하고 표현도 자연스럽다. 해방이 된 이후 좌우의 대립이 심해지자 이종우는 학교생활 외에 다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간혹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곧 국전에 출품할 작품을 할 뿐이었다.
말년은 산에서
195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창설되자 이종우는 교수로 취임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실질적인 교육과 화가로서의 활동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제2회 국전 심사위원장이 된다. 이젠 명실상부한 화단의 원로가 된 것이다. 이후 지속해서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그는 여러 갈래의 작품을 다 잘 그렸는데, 특히 풍경이나 정물 등을 인상파 기법으로 잘 그렸다.

▲이종우 <아침>
황정수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중에 특별한 것으로 1957년 제6회 국전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품한 <아침>이란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노년에 들어가며 무르익어 가는 이종우의 미술에 대한 원숙한 해석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이른 아침 이슬 내린 정원의 신선한 공기가 잘 드러나 있다. 자유로운 형태를 보이는 조선백자는 결백한 이종우의 심성을 보는 듯하고, 난초 등 푸른 풀들은 시들지 않는 화가 이종우의 화가로서의 푸른 에너지를 보는 듯하다. 구성, 색감, 필치 등 어느 하나 손색없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전에 출품된 후 행방이 잊혀 있었다. 그런데 2016년 어느 날 느닷없이 한 경매회사에 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출품자는 5.16 주체 세력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김종필'이었다. 이 작품이 어떻게 해서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작품 뒷면을 보았다. 그랬더니 하얀 조그만 종이에 '총리공관'이란 말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총리 공관에 걸려 있던 작품이란 뜻이다. 어찌된 일일까?
김종필씨가 국무총리를 한 시절은 1971년에서 1975년까지 4년간이다. 마침 이 기간에 속하는 1974년에 발간된 이종우의 도록이 있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27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소장처가 어디인가를 살펴보니 '김종필 소장'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본래 김종필 소장이었다는 의미이다. 총리가 되자 자신의 소장품을 가져다 걸었다가, 총리를 그만두며 다시 집으로 가져 왔다는 의미가 된다. 재미있는 작품 수장 흐름이다.
이종우는 말년에 북한산 자락에 화실을 내고 북한산과 도봉산의 사계절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마치 말년을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싶어 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도 조선조 문인화처럼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이때 그린 그의 작품은 서양화라기보다는 한 폭의 수묵산수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때의 작품들이 인상파 기법을 기조로 하여 유사한 소재를 반복하였고, 작품도 뛰어난 감성을 보여주지 못한 한계에 있다는 점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한 화가가 평생토록 늘 좋은 그림만을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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