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여 <석굴암의 아침> 1940
황정수
정종여의 작품은 전통적 남화를 새롭게 해석해보고자 하는 '신남화' 실현에 목표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대부분도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조선미전에 출품한 작품도 그렇거니와 그가 남긴 다른 작품을 보아도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그가 공부한 오사카 지역의 화풍도 일본의 양대 화파인 '교토화파'의 중요한 지역이라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토화파의 대표적인 내용이 '남화'와 '역사화'이다. 그러니 '새롭게 해석된 남화'와 '신선한 감각의 역사화'가 그의 대표작이 되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쉬이 알 수 있다.
이런 정종여의 미술 의식을 보여 주는 작품 중의 하나가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두 번째 특선을 한 <석굴암의 아침>이다. 이 작품은 당시 많은 호평을 들었는데, 마침 이 작품을 둘러 싼 몇 가지 자료가 남아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석굴암의 아침>은 복원된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불상의 왼편 앞부분에 서서 약간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렸다. 불상의 앞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촛불이 이채롭다. 내부 석벽에 조각된 것들이나 질감의 표현 또한 자연스럽다. 석굴암의 매력적인 한 순간을 잘 포착하여 그린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정종여가 경주를 사생 여행할 때의 경험과 그때 얻은 소묘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가 경주를 찾은 것은 1939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동료화가 최근배와 함께였다. 이때 두 사람이 석굴암에 간 것은 둘 다 일본 유학파로 서로 친했던 데다, 당시 석굴암에 가는 것이 미술인들 사이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화를 전문으로 하는 화가들에게는 꼭 찾고 싶은 명소였다.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에 많은 이들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았다. 특히 일본인들이 많았다. 1920년대에는 일본의 정치계 거물이나 군인들이 주로 찾았고, 1930년대에는 일본 미술인들이나 명사들이 많이 찾았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석굴암 관광이 절정에 이르러 토함산 꼭대기까지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가마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대중화 되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경주를 여행하는 유행이 생겼다. 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도 이때 본격화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오는 유명한 명사들이나 화가들은 한국에 살고 있는 지인들의 안내를 받아 경주를 여행하는 것을 훌륭한 대접으로 생각하였다. 대개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즐겨 찻는 곳은 경성, 경주, 평양, 금강산이 4대 대표적인 명승지였다. 경성의 고궁, 경주의 불교 유적, 평양의 명승과 유적과 그리고 기생, 아름다운 금강산은 일본인 또는 여유 있는 한국인들에게 최고의 여행지였다.
당시 석굴암은 '석불사(石佛寺)'라 불렸는데, 석굴암 앞에 있는 절이 석불사였다. 당시 석불사는 석굴암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저명인사들이 방문하면 방명을 받거나 필적이나 그림을 받는 풍습이 있었다. 문인들이나 명사들이 방문하면 좋은 명구나 시구를 적었고, 화가들은 그림을 남겼다. 이때 남겨 놓은 서화첩과 방명록이 전한다.
한국인 중에는 시인인 파인 김동환의 글씨가 보이고, 몇몇 문인들의 필적도 있다. 미술인 중에는 역사화를 잘 그린 이여성이나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 등 월북 미술인이 글씨를 남겼다. 화가로는 정종여, 최근배, 김용조 등이 서화첩에 그림을 남겼다. 정종여와 최근배는 석굴암에서 내려다본 토함산의 모습을 그렸고, 김용조는 금강역사의 모습을 간단하게 그렸다.

▲정종여 <토함산 소견> 1939
황정수
정종여 작품 <토함산 소견>은 석굴암에서 토함산을 내려다보며 시야를 넓게 하여 호방하게 그린 것이다. 1939년 기묘년에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몰골법을 중심으로 산뜻하게 그린 신남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맑은 화면이나 감각적인 붓 선에서 정종여의 필체가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석굴암 방문 주변 상황을 생각해보면 당시 정종여의 경주와 석굴암 방문은 다음 해에 있을 조선미전에 출품할 작품을 생각하기 위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때 얻은 석굴암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그 작품이 <석굴암의 아침>이다. 이 두 작품 사이의 행간을 읽으면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할 만큼 생생하다. 이러한 노력이 연이은 특선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깊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정종여의 작품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 유족이 남쪽에 있고, 소장가 손에 있는 것도 꽤 된다. 지나친 다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연구자들에게는 반가울 만큼 많은 양이다. 필자는 늘 정종여에 대한 연구가 더 진척되어야 한국 근대미술사가 더욱 화려해진다고 말한다. 다른 월북 작가들이 전하는 작품이 지나치게 적어 전모를 알기 어려운 것에 비해 정종여 만큼은 연구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 월북 작가 중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가 정종여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종여가 지니고 있는 복잡한 '디아스포라(Diaspora)적 삶'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또한 일본에서도, 그리고 남북 분단 후 북한에서도 승승장구한 화가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의 저항과 순응, 해방공간의 좌익과 우익, 남한과 북한의 이념 대립과 같은 굴곡의 역사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복잡한 인생 때문에라도 월북 작가에 대한 연구의 성패는 정종여 연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정종여 미술세계의 전모를 파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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