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17 09:11최종 업데이트 19.01.17 09:11
서촌 지역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였던 중요한 작가 중의 한 명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조각가인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다. 그는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 1901-1978)이 중심이 되어 어울렸던 '옥동패'라 불린 친구들 중의 큰 축을 이루는 한 명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동양화나 서양화를 전공하였는데, 김복진만이 조각을 전공한 인물이었다. 후에 서촌 지역에 조각에 뜻을 둔 이들이 모여든 것도 모두 김복진이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사직공원 앞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 옥인동 이승만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당시 화단의 중심인물들과 교류하였다. 
 

김복진 ⓒ 황정수

 
김복진은 충북 청원의 팔봉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문학에 관심이 많고 독서열이 강하였다. 1920년 고보를 마치고 뜻한 바가 있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본래 정치에 뜻을 두어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시험에 낙방한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도쿄미술학교이다. 

동양화가 김은호의 기억에 따르면 김복진은 법학과를 낙방하고 우에노 공원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서 일본미술원전람회를 구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석고에 채색을 한 <노자>라는 조각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조각을 전공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때 그의 아우 김기진이 함께 있었는데, 두 사람은 공원 의자에 앉아 한참 토론을 하여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정치나 경제를 전공하는 것을 은근히 꺼려하였다. 식민지 경영에 위험한 사상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을 택하여 일본에 유학하면 외국인들에게 입학시험을 면제하여 주는 특혜를 주었다. 이를 '선과(選科)'라 하였다. 그러나 곧 선과가 폐지되고 한국인도 본과 시험을 치러야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김복진은 1920년 선과로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다. 

김복진은 미술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주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연극이었다. 그는 방정환, 박승희 등과 함께 열심히 연극 구경을 하러 다녔다. 1923년에는 박승희, 이서구, 김명순, 이제창, 김팔봉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연극 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창설한다. 한편으론 이승만, 윤상열, 이제창 등과 '토월미술연구회'를 조직하고, YMCA 정측강습원에 미술연구소를 개설하고, 박영희, 김기진 등과 좌익 예술 단체인 '파스큐라(PASKYURA)'를 조직하기도 한다.

점차 시간이 흐르며 미술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 1924년 제5회 제국미술전람회에 <나상(裸像)>이란 작품을 출품해 입선을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조각 부분에 입선한 것은 김복진이 처음이었다. 이 작품은 로댕의 <이브>라는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한 것이었는데, 너무 열심히 제작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각기병을 얻기까지 했다고 한다.

1924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모교인 배재고보의 미술 교사로 재직한다. 이듬해 경향적인 예술단체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을 창립한다. 이 때 조직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카프 활동으로 구속되어 5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이때 붙잡힌 곳이 이승만의 옥인동 집이었다. 출옥하여 1930년부터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일을 시작한다.

그는 미술비평에도 많이 관여했는데 그의 날카로운 비평은 작가들과 불화가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번은 조선미전 출품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나혜석과 논쟁을 하여 다툰 일은 많은 미술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또한 안석영과 함께 '서(書)와 화(畵)의 분리'나 '미술의 사회성과 시대성'과 같은 평론을 썼는데, 부작용이 생겨 선배, 동료들과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도영, 고희동, 최우석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활동

일본의 명문학교인 도쿄미술학교 출신 미술가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에 출품을 잘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과 국내 출신 미술가들과의 경쟁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복진은 이러한 의식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운 친구들에게 전람회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도 한다.

제4회 조선미전이 열리기 한 달 전쯤엔 이승만, 안석영 등에게 미전 참여를 권유하고 함께 작업한다. 이승만도 이때 처음으로 조선미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세 사람은 멤퍼드 상회라는 양품 판매점 주인이었던 이상필(李相弼)의 도움으로 경교장 뒤에 있던 그의 집 바깥채 아랫방을 화실로 쓰며 그림을 그렸다. 바로 옆방에는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과 묵로 이용우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상필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였다. 그는 문화 사업에도 열의가 강해 예술 방면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를 하여 그의 후원을 받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는데, 겨울철에는 사냥을 주로 했으며 승마도 즐겼다. 그런데 우연히 사기도박단에 걸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낙향을 하고 말았다. 미술을 사랑한 훌륭한 후원자 한 명이 사기에 걸려 사라진 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복진 <나체 습작>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서 재촬영 ⓒ 황정수

 
조선미전을 준비한 세 친구 중 안석영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 출품을 포기했고, 김복진과 이승만 두 사람만 작품을 완성해 출품한다. 김복진은 세 점을 출품하였는데, 그 중 <삼년 전>이라는 작품이 3등상을 받아 두 점이 입상하였고, <나체 습작>은 입선에 들었다. 이승만은 수채화를 내어 4등상을 받았다. 동갑내기 두 친구가 모두 특선에 드는 큰 상을 받은 셈이다. 

전시는 상품진열관이란 곳에서 열렸다. 그런데 전시 시작 전부터 큰 문제가 생겼다. 개관 하루 전날 누군가 김복진의 작품 <나체 습작>을 훼손한 것이었다. 개관을 앞두고 작품의 전시 장소를 결정하느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그만 여인상 한 쪽 팔이 뚝 부러져 나간 것이다. 이 소문이 각 신문에 보도되면서 급속도로 퍼졌다. 급기야는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의 작품에 일부러 손을 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전화위복이라 할까. 이쯤 되니 개관 첫날부터 김복진의 작품은 전시장에서 단연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왼팔이 떨어져 나간 조각 <나체 습작> 앞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혼잡을 이루었다. 더욱이 다른 한 작품은 3등상을 받았고, 한 작품은 훼손되어 화제가 되니 당시에 무명이었던 김복진은 일약 유명 미술가가 되었다. 당시 미전은 호외가 나올 정도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행사였다. 

그런데 제4회 조선미전에서는 이 외에도 다른 특별한 해프닝들이 있었다. 이한복이 출품한 서예 작품 <난정서>가 출품된 후 구멍이 뚫어져 수선해 놓은 것이 발견된 일도 있었다. 또한 서양화 부분에 출품된 이제창의 나체화는 4등상에 입상한 것인데,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사진 촬영을 금지했다. 주최 측은 한 곳에 진열하여 두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사진 찍는 것은 풍기에 좋지 못하다 하여 촬영을 금지한 것이다. 이 사건들도 신문에 대서특필 되어 이 전람회는 화제만발이었다.

<나체 습작> 사건으로 일약 유명한 조각가의 반열에 올라선 김복진은 다음해 1926년 제5회 조선미전에서도 <여인>이란 작품으로 특선에 오른다. 조각부에서 한국인 중에 단연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연거푸 특선에 오른 김복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다.
 

김복진 <불상 습작>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서 재촬영 ⓒ 황정수

 
김복진은 십 년이 지난 1936년 제15회가 되어서야 <불상 습작>이란 작품으로 다시 등장한다. 그동안 서구적인 작품으로 수상을 하였던 것에 비해 갑자기 불상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동안 작품을 출품하지 않은 데에는 정신적인 방황의 시간이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복진은 일본의 한 절에 머물며 인간적 고뇌와 불교적 깨달음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이광수에게 토로한 적도 있었다. 

이후에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비교적 지속적으로 작품을 출품한다. 1937년 16회에는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특선을 하였고, 다음해 17회에는 <백화(白花)>라는 작품으로 무감사 출품을 한다. 한 해를 거르고 1940년 19회 미전에는 두 점을 출품한다. <소년>이란 작품은 특선에 들고, 박영철의 흉상으로 제작한 <다산 선생상>은 무감사에 든다. 이때쯤 김복진은 단순한 한 명의 조각가라기보다는 한국 조각계를 이끄는 거물의 위치에 선다.

현전하는 작품

김복진은 현대적 개념의 조각가로는 참으로 불행한 인물이다. 현재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은 대부분 불상과 같은 불교미술뿐이다. 서양미술에 바탕을 둔 개인 작가로서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세상을 떠났을 때 50점 남짓한 작품이 작업실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막판에 일제의 쇠붙이 공출로 사라졌고, 목조와 소조의 유작품마저도 동생인 김기진의 인쇄소 창고에서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김복진 <미륵전 본존불> ⓒ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불상으로는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 미륵전의 '본존불'이 그의 작품이다. 미륵전은 내부의 위아래가 뚫려 있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본존불은 높이가 12미터가 넘는다. 이 작품은 기존 불상 조성 방식과 달리 서양조각 재료인 석고를 써서 제작하였다.

원래의 본존불은 미륵전을 중창한 1635년에 조성한 것이었다. 이 본존불은 특이하게 커다란 무쇠 솥 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참배객들은 삼존불에 배례하고 무쇠 솥과 대좌 사이 공간에 시줏돈을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동자승이 촛불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솥 내부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불길은 곧바로 불상 내부 목재에 옮겨 붙었고, 본존불은 무너지고 말았다. 금산사는 미륵본존의 복원 불사를 추진하였고, 공모를 하여 결국 김복진이 맡아 하게 된 것이다. 
 

김복진 <법주사 미륵대불> ⓒ 황정수

 
법주사의 미륵대불도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륵대불은 김복진이 머리 부분을 완성하고 전체 비례를 잡아 놓은 상태에서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미륵대불은 그의 제자 윤효중이 맡아 1963년에야 완성시켰다. 이 작품도 당시로서는 희귀한 소재인 시멘트로 조성했는데, 후에 시멘트 조각이라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미륵대불은 1990년 금동불로 다시 만들어져 이제 김복진의 본래 솜씨는 거의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밖에 남아 있는 김복진의 불상 작품은 몇 점 안된다.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 입상, 충남 예산 정혜사 관음보살좌상, 충남 공주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 등 10여 점이 채 안 된다. 

김복진의 조각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전한다. 그는 1928년 경찰에 붙잡혀 6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김복진은 참담한 감옥살이 중에도 먹지 않고 남긴 밥을 주물러 점토처럼 만들고는 인물상과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솜씨에 놀란 간수들이 김복진을 목공소로 보내 작은 목조불상을 깎게 하여 감옥소 직매장에서 팔게 했다는 것이다. 훗날 그가 불상 조성에 힘을 기울인 것과 통하는 이야기이다. 

김복진의 딸 사랑과 허망한 죽음
 

김복진 <백화>와 <소년>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서 재촬영 ⓒ 황정수

 
1934년 출소한 김복진은 소설가 박화성의 소개로 당시 배화여고보 교사로 있던 허하백(許河伯, 1909-?)과 만나 1년 후에 결혼한다. 결혼식은 황해도 배천온천에서 하였다. 주례는 김복진이 다니던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이다. 허하백은 숙명여고보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교사를 하던 재원이었다.

김복진은 유달리 큰 체구를 가지고 있었으나 성격은 매우 유순하였던 반면, 허하백은 외향적이고 냉철한 성격이었다. 1937년 두 사람은 사직공원 앞에 화실이 끼인 산뜻한 2층 양옥을 짓는다. 이곳이 바로 한국 최초의 조각 화숙인 '김복진미술연구소'이다.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문석오, 이국전, 윤승욱, 김정수 등등 여러 신인들이 입상하는데 모두 김복진의 제자들이다. 이미 조선미전의 조각부는 거의 김복진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복진미술연구소가 자리 잡히자 두 사람 사이에 '산용(山瑢)'이라는 귀여운 딸이 태어난다. 아이를 두 번이나 실패하고 나이 마흔 가까이 되어 얻은 아이니, 그 귀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귀하다는 뜻으로 '보보(寶寶)'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김복진은 늘 어디가든지 보보를 팔 위에 안고 나갔고, 출장 후에는 반드시 보보의 선물을 사가지고 왔다. 옷이나 모자 하나를 사도 아이에게 맞도록 자기가 다시 고쳐 입히곤 하였다. 

얼마나 아이를 안고 다녔는지 오랜 옥중생활로 뒤로 돌아가지 않던 한쪽 팔이 보보를 안고 다니면서부터 다시 건강하여질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때는 겨우 돌이 지난 아기를 팔 위에 앉히고 종로나 진고개를 오랫동안 배회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일 때문에 만주, 도쿄, 또는 국내 지방으로 돌아다닐 때에도 반드시 보보 사진을 수첩에 붙여 가지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김복진은 딸의 출생을 계기로 청춘기로 돌아가 작업에 몰두하여 필생의 역작을 남기려는 의욕을 갖는다. 그래서 아내와 딸과 함께 모두 도쿄로 이주하려 결심한다. 먼저 도쿄로 건너간 김복진은 가족이 살 수 있는 모든 설계를 거의 다 해놓고 10일 만에 돌아온다. 그러나 바로 그날부터 보보가 병에 걸려 아프기 시작하더니 결국 4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치료가 힘든 전염병인 장티푸스였다.

아이가 죽자 김복진은 넋이 나가 극도로 쇠약해져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일어나면 무작정 거리를 배회하곤 하였다. 딸이 죽은 일주일이 되자 김복진은 중이 된다고 머리를 깎고 돌아와 "부모가 돌아가 따라 죽으면 '효자'라 하고, 남편을 따라서 죽으면 '열녀'라 하는데, 부모가 자식을 따르면 '무엇'이라고 할까"라며 거의 발광하다시피 소리쳤다고 한다.

얼마 후 겨우 정신을 차린 김복진은 한동안 법주사 미륵대불과 청주 용화사 불상을 마무리하겠다고 돌아다니더니 얼마 되지 않아 몸져눕는다. 즉시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 효과가 없어 김복진 또한 하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바로 딸이 죽은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더니 딸과 같은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이다. 그가 바라던 대로 딸을 따라갔는지 모르겠다.

김복진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편지 한 통을 전한다. 1940년 11월에 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이다. '사랑하는 딸 보보에게'라는 제목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오늘 동경(東京)을 떠나서 대판(大坂) 갔다가 그 길로 집으로 가겠다. 그동안 퍽 컸겠지. 엄마하고 싸우지 않고, 동네 아이들하고 잘 놀고 하였나. 이번 가을부터 보보가 살 집을 구하고 다녔다. 그리고 보보 동무될 사람도. 머리 깎고 매일 물장난하고, 옷을 자주 갈아입고, 모기, 딱정벌레 물리지 말고 잘 있다가 정거장에 나오너라. 이제 아빠는 보보 없이는 못살 지경이다. 보보 그러면 배탈 나지 말고, 감기 들지 말고, 모기 물리지 말고, 자빠지지 말고, 땀띠 나지 말고, 나흘 밤만 기다려라."

구절구절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듬뿍 묻어난다. '아빠'라는 호칭에서 김복진의 순수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흠집 하나 없이 키우고 싶었던 아비의 마음도 헛되이 속절없이 아이는 세상을 떠나고 마니, 아비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결국 순수한 동심을 지닌 김복진은 '보보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지키려는 듯 사랑스러운 딸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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