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속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송석원시사는 사대부에 비하여 신분이나 경제력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던 위항인들이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자기 권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문학적 모임의 시사로도 볼 수 있다. 이 점은 그들의 시사 결성 취지에서도 확인된다. 송석원시사의 취지문인 '서옥계사수계첩후(書玉溪社修禊帖後)'에서 장혼은 같은 중인 계층이면서 비슷한 나이에 서로 가까이 거처하는 친한 사람들끼리 시사를 결성하고 문학적 교유를 표방하였음을 밝혔다.
이 시사는 당대 위항문인들의 집결체였다. 이들의 활동은 책으로도 발간되어 전하는데, 1797년에 <풍요속선>이 대표적이다. <풍요속선>은 천수경이 편집하고 장혼이 교열을 한 책이다. 이 책은 <소대풍요>와 같은 중인들 시집의 뒤를 이어 위항인들이 정기적으로 그들의 시선집을 간행하는 전통을 수립하는데 큰 구실을 하였다. 위항문학의 큰 축을 이루었던 송석원시사는 그 구성원의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융성하여, 정조 연간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1818년까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천수경은 중인이었던 탓에 기록이 많지 않아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의 자식들 이야기만은 유명하다. 그는 아들을 다섯 두었는데 첫째는 '송(松)', 둘째는 '석(石)', 셋째는 '족 (足)', 넷째는 '과(過)' 다섯째는 '하(何)'라 이름자를 지었다고 한다. '송'과 '석'은 그가 사는 송석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고, '족'은 아들 셋이면 족하다는 뜻이었다. '과'는 넷이면 너무 많다는 뜻이요, '하'는 아들이 다섯씩이나 되니 어찌하면 좋으냐?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가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만큼 천수경의 이름이 높아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당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송석원시사의 모습을 그린 '옥계청유첩'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회를 열었던 송석원시사의 활동 모습을 그린 귀중한 그림이 전한다. 보통 시회의 결과는 참여한 사람 중의 한 명이 글을 거두어 다시 곱게 필사를 하여 첩으로 만들어 보존한다. 그런데 시회의 구성원 중에 그림을 잘 그리는 이가 있으면 그에게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게 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시사 모임의 기록 중에는 작가 미상의 시회 그림이 붙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회원 중에 그림 솜씨 좋은 이가 있어 그린 것이다. 만일 시회 모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여 좋은 첩으로 만들고 싶을 경우에는 유명한 화사에게 부탁하여 시회의 모습을 그려 받는다. 이런 경우 화가는 시회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자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을 듣거나 현장을 답사하여 그린다.
1791년 유두절(음력 유월 보름날)에 열린 송석원시사의 시회 모습은 이날 지은 글들을 모아 두었던 시사 회원인 김의현(金義鉉)에 의해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란 제목의 시첩으로 만들어진다. 김의현은 평생 인왕산 자락에서 서화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던 위항시인 시한재(是閒齋) 김순간(金順侃)의 아들이다.
그는 대대로 경아전 생활을 한 중인이었으나 집안이 넉넉했기에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이인문과 김홍도 두 사람에게 그림을 부탁해 시첩을 장식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행사가 있었던 6년 후인 1797년에 김홍도와 친분이 깊었던 서예가 미산(眉山) 마성린(馬聖麟:1727~1798 이후)이 이 자료들을 보고 쓴 다음 기록에서 짐작된다.
"내 어느 날 김의현의 집 유죽헌(有竹軒)에 들러 보니 책상에 <옥계청유첩> 한 권이 있었다. 펼쳐 보니, 단원 김홍도가 맨 앞의 그림을 그렸고 고송유수관 이인문이 이어서 그렸으며, 그 다음은 여러 군자가 각기 시를 짓고 썼는데, 무릇 그 화법의 신묘함과 시와 글씨의 맑고 참됨이 '난정수계'나 '서원아집'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71세 미산옹 마성린이 쓰다."
이 기록을 보면 마성린이 이 작품들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서문을 추가하고 이인문과 김홍도의 그림에 화제를 추가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의현이 당대 최고의 화가인 이인문과 김홍도에게 그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의현의 신분과 연결시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김의현은 규장각 서리(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이속)로 있었는데, 마침 이인문도 규장각에 화사로 있어 부탁이 용이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인문과 김홍도는 동갑내기 친한 친구라 쉽게 소통하여 부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송석원시사 회원 중의 한 명인 서화가 임득명(林得明·1767∼?)이 규장각 서리로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인문의 <송석원시사아회도>

▲ 이인문의 <송석원시사아회도>
한독의약박물관
이인문과 김홍도 두 사람의 그림은 시첩 앞에 차례로 실려 있다. 이인문의 그림은 낮 풍경을 그린 것이고, 김홍도의 작품은 밤 풍경을 그린 것이다. 첫 장에 실린 이인문의 그림 <송석원시사아회도(松石園詩社雅會圖)>는 송석원시사 회원 9인이 낮에 모여 시회를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암산으로 유명한 인왕산 큰 바위 앞 너럭바위에 아홉 명의 시인들이 두세 명씩 따로 편하게 앉아 시를 구상하고 있다. 이인문의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필치가 유려하다. 수성동에서 흘러내려 옥류동천으로 흐르는 계곡물의 흐름도 자연스럽고, 산자락에 자리 잡은 바위와 소나무의 모습이 '송석원'의 이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 쓴 화제를 보면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이 단원의 집에서 그린다(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文郁 寫於檀園所)"라는 글이 씌어 있어 이인문이 김홍도의 집에서 함께 그림을 그린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림 속의 장소가 김홍도의 집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곳이 김홍도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인문과 김홍도는 같은 시회의 회원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김의현의 부탁을 받고 두 사람이 김홍도의 집에 모여 그렸다는 뜻이다.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
▲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한독의약박물관
이인문의 그림에 뒤이어 김홍도가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가 실려 있다. 낮에 시를 지으며 한 아회 모임이 이어진 밤 풍경의 모습이다. 당시 아회는 보통 낮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시를 짓고, 저녁에는 술과 좋은 음식을 차려 놓고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낮에 지은 시나 그림에 대하여 품평을 하는 경우도 있다. 품평은 회원들끼리 하는 경우도 있지만 특별한 경우엔 당대의 저명한 시인묵객을 초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추사 김정희도 세상에 글로 이름이 난 뒤에 송석원시사의 품평인으로 초청받아 간 적이 있었다.
우측에 마성린이 1797년에 추가한 화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더위 찌는 밤에 구름과 달이 아스라하니,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라게 해 아찔하게 하는구나"라며 김홍도의 그림에 호평을 하고 있다. 실제 그림을 보면 하늘에 달이 떠 있어 밤 풍경임을 알 수 있고, 아홉 사람은 취흥이 고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왼쪽 아래에는 '김씨운림서소(金氏雲林書所)'라고 적혀 있다.
한때 김홍도 자신의 집이라는 설도 있으나 김홍도는 그림을 부탁받아 그리는 것일 뿐 아회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므로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회의 참석자이자 이 시첩의 주인인 김의현의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좀 더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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