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식 <탑원도소회도>
황정수
조석진과 안중식을 앞세운 서화미술회 초기의 강습소는 중학동에 있었는데 곧 백목다리(지금의 신문로) 근처에 있던 큰 한옥 건물로 옮겼다가 1915년에 다시 관철동으로 옮긴다.
두 집 다 친일파 이지용 소유의 집이었다. 서화미술회는 '서과(書科)'와 '화과(畵科)'의 두 과로 나누어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수업 연한은 서화 전공별로 3년이었고, 수업료는 전혀 받지 않았다. 정규학생 이외에도 단기적인 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수진은 당시 서화계의 대가였던 조석진과 안중식을 중심으로 강진희, 정대유, 김응원, 강필주, 이도영 등이었다. 이들의 교육 방법은 '고법(古法)'을 전수하는 방식이었으며, 학생들은 선생들이 여러 체본을 그려주면 그것을 일일이 임모한다든가 또는 중국 화보인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따라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따금 실물 사생을 하였으나 많지는 않았고, 주로 옛 화법에 따라 기초 훈련을 쌓는데 중점을 두었다.
서화미술회 출신의 대표적 화가로는 제1기생으로 오일영, 이용우, 제2기생으로 김은호, 제3기생으로 박승무, 제4기생으로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20년 이후 한국 근대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되었다.
서화미술회는 더욱 발전하여 1918년 서화협회를 결성한다. 서화협회는 안중식·조석진의 서화미술회가 1915년에 설립한 김규진의 서화연구회를 규합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특히 춘곡 고희동이 한국 미술계의 주체적 근대화와 활성화를 위해 미술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결성을 주도하였다.
당시는 일본인 서양화가들이 건너와 조선미술협회를 조직하고 미술계를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때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주체적인 미술단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단체 이름에도 미술이란 단어를 뺐다고 한다. 그러니 서화협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 단체라 할 수 있다.
서화미술회, 서화협회 회원들의 거주 공간 서촌
서화미술회가 있던 백목다리 근처는 신문로, 곧 지금의 조선일보사 뒤 어디쯤 되는 곳이었다. 당시 서촌에서 흘러내린 옥류동천이 내려가는 곳 어디쯤에 백목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곳에 안중식과 조석진이 있었고,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서화미술회의 서예 선생이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 당주동에 자신의 서실을 차리고 있었다. 또한 서화미술회의 졸업생이자 서화협회 회원인 서화가들은 주로 서촌 지역에 살았다.
또한 서화미술회 회장으로 있었던 이완용은 옥인동에 대 저택을 지니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서화미술회 회원들은 종종 이완용의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고 한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 <서화백년>에는 한일합방의 주역인 이완용과 서화미술회와의 관계를 술회한 대목이 나온다. 당시 서화미술회에 출입하던 김은호가 곁에서 지켜보며 겪었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마치 지금의 현실처럼 생생하다.
"서화미술회는 1911년 3월 22일에 문을 열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심이 흉흉하던 터라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을 내세워 이왕직과 손잡고 서화미술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합방에 공이 컸던 일당 이완용을 교장격인 회장 자리에 앉혀 놓았다. 일당은 매국노 소리를 듣던 때라 어디 가나 반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글씨도 잘 쓸 뿐 아니라 그림에도 취미가 있어 서화미술회에 나온 것이다. 한 마디로 취미도 살리고 말벗도 찾자는 의도였다. 총독부는 총독부대로 그를 내세워 서화에 취미가 있는 선비, 소위 문화계 인사를 포섭하자는 내심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당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서회미술회에 나와 앉아 있다 가곤 했다. 단아한 체구였지만 다부지게 생겼었다. 어떻게 보면 눈이 부리부리한 게 독하게도 보였다. 나와 무호 이한복, 정재 오일영, 농천 이병희 등은 한동안 효자동의 일당(一堂) 집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웠다. 그는 우리들을 말동무로 불러들였다. 일당은 당시 귀족들 중에서는 가장 붓글씨를 잘 썼다. 그러나 일본 서도전람회 미술전에 출품했지만 입선도 못했다. 성당 김돈희, 해강 김규진, 석정 안종원과 함께 냈는데 성당과 해강만 입선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일당 이완용이 겪은 노년의 삶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완용의 집은 당시 서양식으로 지은 대형 2층집이었는데 호화롭기로 유명하였다. 지금도 그의 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이 그 자리에 있는데 외형만 약간 손질했을 뿐 골격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근처가 모두 그의 집터였다고 하나 이제는 그 저택만 남고 주변 필지는 모두 분양되어 옛 모습을 잃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집은 여전히 그 위용을 보이고 있어 당대 그가 가진 위세를 짐작케 한다. 1910년에는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1912년경에는 윤영기로부터 경성서화미술원을 빼앗아 미술계의 제왕 노릇을 한 이완용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 인물의 역사적 평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완용의 뛰어난 글씨 솜씨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칭하지만 글씨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 썼다고 한다. 재능이 뛰어난 서화미술회 학생들이 배우러 다닐 정도였다. 현재 전하는 글씨들을 보면 어느 하나 허튼 것이 없다. 그의 글씨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재주꾼의 글씨이다. 기교가 너무 승하여 빼어난 기교를 보이나 독창적인 예술 작품으로서는 품격이 높다고는 할 수 없다.

▲ 이완용 <천하태평춘>
황정수
그의 글씨는 붓놀림이 재빠르고, 세련된 맛이 있고, 글자간의 크기 차이도 자유롭다. 크고 작은 글씨를 조화롭게 굵은 선과 가는 선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진득한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뛰어난 기능을 지닌 빼어난 테크니션이다.
그래서 어떤 글씨는 매우 예뻐 애교를 느낄 정도이고, 획을 길게 빼어 쓴 글자의 마지막 획은 그의 능청맞은 성격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특히 자유로운 구성을 바탕으로 쓴 큰 글씨가 그럭저럭 좋으며, 간찰 등에서 보이는 잔글씨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서화미술회의 흔적을 보여주는 병풍 한 틀

▲ 조석진 그림·이완용 화제 <산수화 10폭> 가운데 뒤 5폭.
황정수
한국 미술 근대화 주역 중의 한 명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이 산수화를 그리고 천하의 역적 이완용이 화제를 쓴 <산수화 10폭 병풍>이다. 참으로 보기 드문 병풍이다.
191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병풍에는 조석진이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각 폭 모두에 이완용이 특유의 필체로 화제를 썼다. 이완용이 남의 그림에 화제를 쓴 것은 그리 흔치 않다. 그는 학부대신을 역임한 명사인데다가 을사오적이란 지탄을 받고 있던 터라 자유로이 화가들과 어울리지 못한 탓도 있다.
▲조석진의 산수, 이완용이 화제를 쓴 부분
황정수
이 두 사람이 합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화미술회가 매개가 되어서이다. 이완용은 서화미술회의 회장을 하였으며, 서화협회의 고문을 맡게 되었다. 이때 화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이때 조석진은 서화미술회의 화과 선생으로 안중식과 함께 좌장 역할을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듯하다. 조석진은 전형적인 중국풍의 그림을 치밀하게 그린다. 상대가 이완용인 것을 의식하였는지 성의를 다하여 산수 10폭을 화려하게 그렸다. 이완용은 각 폭 모두에 한시 한 편씩을 적는다.
사실 규모가 큰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이 합작한 행위는 예술적으로 큰 성과를 거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석진도 본래 자신이 추구하는 양식에 비해 훨씬 여리면서도 아름답게 풍경을 그렸다. 일반적인 자신의 과감한 필선에 비하면 다분히 얌전하고 여성적이다. 이완용의 글씨 또한 극단적으로 다듬은 행초서를 썼다. 조석진의 화려한 그림에 맞추어 다양한 기교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림과 글씨는 서로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조석진의 그림이 그답지 않게 복잡하고 화려한데다, 이완용의 글씨 또한 빼어난 잔 기교로 그림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잡한 구성의 그림에 비해 글씨가 너무 작을 뿐 아니라 글자의 조형조차도 한데 녹아들지 않는다.
화제의 자리 배치도 잘 맞지 않는다. 그림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 배치를 한 이완용의 무성의가 눈에 거슬린다. 역시 거장 두 사람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배려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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