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3 10:59최종 업데이트 18.12.13 10:59
1943년 8월 3일, 역사화를 잘 그렸던 화가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은 역사학자 이병도와 함께 경주를 찾아 석굴암에 오른다. 그는 석굴암 방명록에 "늙도 젊도, 웃으시나뇨, 노하시나뇨. 내 당신 못 잊어 다시 왔다 가나이다"라고 시적인 표현의 소감을 적는다. 그리고 끝에 "서울 '옥동(玉洞)' 사는 청정 이여성이란 속상(俗尙)이외다"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여기에서 이여성이 언급한 '옥동'은 경복궁 옆 서촌에 있는 '옥인동'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서촌에는 많은 미술가들이 살고 있었다.
 

이여성의 석굴암 방명 글씨 ⓒ 황정수

 
일제강점기에 서촌 지역에 많은 미술가들이 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예로부터 '우대(上村)'라 불린 이곳에는 실용적인 일을 많이 하던 중인들이 주로 살았다. 특히 미술에 관심이 많은 역관이나 화가 그리고 시·서·화에 능한 묵객들이 많이 살았다.

이런 분위기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미술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다. 또한 서촌 아래 광화문 지역에는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끌던 '서화협회'가 있었고, 서화협회 고문이었던 이완용이 옥인동에 살았던 환경도 이곳에 많은 서화가들이 모여 살게 된 이유일 것이다.


실제 서촌에는 서화협회에서 공부하였던 이한복, 이상범, 노수현, 박승무 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곧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미전) 등을 통하여 한국 화단의 중추 세력이 된다. 이들 중 이상범은 조선미전에 깊이 관여하여 심사참여의 위치에까지 오른다.

이상범이 '청전화숙'을 누하동에 설립하자 많은 제자, 후배들이 서촌으로 모여들었다. 수제자로 불리는 정종여가 사직동에 거주하였고, 동아일보에 함께 재직하던 이여성도 이곳 옥인동으로 이사 왔다. 또한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 이건걸도 그림 재주를 보였다.

동양화가뿐만 아니라 서양화가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미국 유학을 한 장발과 프랑스에 유학한 이종우가 사직동에 살았고,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이제창, 공진형도 근처에 살았다. 이승만, 김중현 등을 중심으로 '옥동패'라 불린 화가들도 주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밖에 이쾌대, 구본웅, 이중섭 등 일본 유학한 한국 최고의 재능들이 예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서촌에 모여 미술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만치 서촌은 미술적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서촌에 살다 후에 월북한 이여성, 이쾌대 형제
 

좌 이쾌대 <이여성>, 우 이쾌대 <자화상>.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 <거장 이쾌대-해방의 대서사시> 도록에서 재촬영. ⓒ 유족 소장

 
서촌에서 살며 뜻을 펼치던 이들 중에서 이여성과 이쾌대(李快大, 1913∼? )는 친형제이다. 두 사람은 경북 칠곡 출신이나 일찍 경성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형 이여성이 먼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동생 이쾌대는 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닌다. 학생 시절 두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 중학동이었는데, 이들이 다닌 학교와 가까운 곳이었다.

공교롭게 두 학교는 계동과 원서동에 이웃해 있었는데, 모두 미술에 선구적인 모습을 보이던 학교였다. 중앙고보에는 고희동, 이종우가 교사로 있었고, 휘문고보에는 고희동, 장발 등 유명한 화가들이 교사로 있었다. 중앙고보에서는 이여성과 김용준이 나와 화명을 날렸고, 휘문고보에서는 이승만, 윤희순, 이쾌대, 전형필 등 미술계 인사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이여성과 이쾌대는 1930년대 후반 중학동에서 서촌으로 이주하여 자리 잡는다. 이여성의 집은 옥인동 56번지였는데, 이상범의 집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이쾌대의 집은 궁정동 16-3 번지였는데, 지금의 청와대 왼쪽 바로 앞이다. 두 사람의 집은 거부인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다.

일찍 결혼한 이쾌대가 곧 유학에서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거처를 준비한 것이다. 아버지 이경옥은 이쾌대가 돌아오기 전 해인 1938년, 옥인동에 2층 목조로 큰 집을 지어 장남인 이여성에게 살게 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막내 이쾌대에게는 1939년 아담한 한옥 집 한 채를 사주어 살도록 한다.

형 이여성은 다방면에 많은 재능을 가진 이였다.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화가이자, 학자요, 평론가이기도 하였다. 호는 청정(靑汀),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이다. 사실 '여성(如星)'이란 이름자도 본래 친구 고모부가 '별처럼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호였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평생 이름처럼 사용한다.

그는 고보 졸업 후 일본 도쿄의 입교대학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새로운 사조였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신여성이었던 성악가 박경희(朴慶姬)와 결혼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회주의 활동과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4년에는 여운형을 따라 건국동맹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초 근로인민당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월북하고 만다.

동생 이쾌대는 휘문고보를 다니던 중 담임교사였던 서양화가 장발의 영향을 받아 미술을 하게 되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한편으론 도쿄에 먼저 유학한 형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제국미술학교에 유학하여 1938년에 졸업한다.

돌아와 궁정동에 3, 4년 살다 보문동으로 이사가 '성북미술연구소'를 차려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 의용군으로 참전한다. 곧 포로가 되어 거제 수용소에서 갇혀 휴전을 맞이하나, 남북 포로 교환 때 자의로 북한을 택하여 넘어간다.

이여성의 '청정'이란 호에 얽힌 우스운 이야기
           

이여성 <어촌 풍경> ⓒ 황정수

 
이여성이 사용한 '청정(靑汀)'이란 호에는 웃지 못 할 우스운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이 호는 한때 일제강점기 최고의 활약을 보인 대구 출신의 서양화가 이인성의 호로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인성의 호를 '청정'이라 부르게 된 것은 작은 오해와 착각에서 온 것이다.

두 사람은 이름 글자가 한글로도 비슷하며, 한자로도 '李如星'과 '李仁星'으로 글자 모양이 흡사하였다. 더욱이 두 사람의 한자 이름을 인장으로 새겨 찍으면 읽는데 혼동이 되기 쉬웠다. 출신지도 같고, 이름도 유사하고, 인장도 닮아 애호가들은 쉽게 두 사람을 혼동하였다. 특히 두 사람의 수묵화 그림은 비슷한 면이 많아 더욱 오해가 깊어졌다.

그런데 이여성이 신념에 따라 1948년 월북하자 6.25 이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에 따라 반공을 국시로 한 남쪽에서 '이여성'이란 이름 세 글자는 금기시 된다. 이에 반해 이인성의 이름은 한층 높아져 한국화단의 대표 화가가 된다. 이때부터 이여성과 이인성의 이름이 더욱 혼동되어 사용되기 시작한다. 혼동이라지만 일방적으로 이여성이 이인성으로 흡수되어 사용되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이인성에 관한 글을 쓰며 이인성의 호를 '청정(靑汀)'이라 착각하여 '청정 이인성'이라 호칭하여 글을 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인성의 호를 '청정'으로 알고 부르기 시작한다. 결국 '청정 이인성'이란 잘못된 호칭은 오랫동안 의심 없이 최근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대 저명한 평론가 이경성이 이여성의 존재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미술계에 있으면서 이를 몰랐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편으론 이여성의 그림이 매우 귀하였기 때문에 이경성이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니 일반인들은 더 의심 없이 이경성의 주장을 따라 하였을 것이다. 또한 미술 시장에서는 유사한 두 사람의 작품이 혼동될 때 보통 유명한 쪽으로 가져다 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동양화가이자 민속학자로서의 이여성

이여성이 화가로서 활동한 것은 동아일보에 근무하며 이상범과 만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그는 1934년 서화협회에서 주최한 서화협회전에 출품한 동양화 '어가소동(漁家小童)'이 입선함으로써 화가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한다. 이듬해인 1935년에는 이상범과 함께 동아일보사에서 2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당시 명사였던 두 사람의 전시라 많은 화제가 되었다.
 

이여성 ‘격구도’ ⓒ 말박물관


이여성은 주로 산수화를 많이 그렸고, 때론 정치한 역사화나 풍속화를 그렸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솜씨를 보면 일본 화풍이 매우 강하다. 이를 보면 일본에 유학하며 때때로 일본인 화가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남긴 대표작 '격구도(擊球圖)'를 보면 일본 특유의 역사화 전통과 기법이 보이고, 그의 여러 수묵산수화에서도 일본 신남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또한 화가로 활동하게 되며 이상범과 유난히 가까이 지내는데, 이상범과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동네 주변에 살면서 함께 2인전까지 한 것을 보면 이상범에게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상범의 호가 '청전(靑田)'이고, 이여성의 호가 '청정(靑汀)'으로 '청(靑)'자 돌림으로 호를 공유한 것에서도 미술적인 영향 관계를 짐작케 한다.

이여성은 1936년 말 베를린 올림픽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어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사직 당한 후 동양화에 몰두한다. 그는 신문지상에 자신의 그림을 종종 발표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화단의 혜성, 중년에 화도로 전향한 동양화가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평소 자신의 예술론은 '민중을 위한 창작활동, 즉 프롤레타리아 예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작품들에서 그러한 면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의 산수화는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풍경화일 뿐이다. 그의 장기라는 역사화에서 그러한 일면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남아 있는 작품이 드물어 연구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그의 예술론은 그의 문화사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1947년에 출간된 <조선복식고>는 이여성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한국 최초의 복식사 연구이다.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한국의 복식 분야를 개척한 점에 대단한 의미가 있다. 이여성이 <조선복식고>를 연구하던 시절에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이여성의 옥인동 2층집에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젊고 예쁜 여성들이 조선시대의 옷을 입고 2층 난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여성이 복식을 연구하며 고증을 위해 이화여전 학생들을 초대하여 옷을 입혀 사진 찍으려 한 것인데, 동네 사람들에겐 전에 보지 못하던 구경거리가 되었다. 어찌 보면 한국 최초의 패션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때의 재미있는 해프닝이었다.

특출한 조형의식을 가진 서양화가 이쾌대
            

이쾌대 '운명'.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 <거장 이쾌대-해방의 대서사시> 도록에서 재촬영. ⓒ 유족 소장

 
이쾌대는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이과전(二科展)에서 '운명'이란 작품을 출품해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한다. 당시의 작품은 예민한 조형 의식과 개성적인 표현 감각을 보였는데, 주로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주제로 작업을 하였다. 특히 한 여인의 다른 시기 삶을 한 화면에 배치한 작품들로 주목을 받았다.

이 기법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이란 기법을 차용한 것인데, 그의 탁월한 조형 의식과 맞물려 더욱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41년에는 도쿄에서 이중섭, 진환, 최재덕, 문학수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도쿄와 서울에서 동인전을 가졌다. 신미술가협회는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성과를 보인 특별한 미술단체였다.
              

이쾌대 <군상 4>.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전시 <거장 이쾌대-해방의 대서사시> 도록에서 재촬영. ⓒ 유족 소장

 
이쾌대는 1945년 광복 후에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좌익의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어 사상적 경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1947년에는 이전과는 달리 '진정한 민족예술의 건설'을 표방하면서 김인승, 조병덕, 이인성 등 18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스스로 사상적 방향에 대한 고뇌가 깊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인생 역정과 조국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군상' 연작이 이때 제작된다. 이 작품들은 훗날 한국 근대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근래에 이쾌대만큼 한국 근대미술에서 주목 받는 이는 없다. 가장 저평가된 화가라는 숙제에서 시작하여, 언젠가부터 재평가해야 할 주요작가로 인식되더니, 급기야는 가장 중요한 근대작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박수근이나 이중섭, 김환기에 이어 가장 중요한 작가의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한동안 '월북 작가'라는 굴레에 묶여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추세가 작품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평가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작품이 예술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경지에 있는 것인지, 그의 미술 작품이 얼마나 독창적인지에 대해 치밀한 연구가 먼저 이루어져야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한국미술계가 서둘러야 할 연구 과제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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