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사 사형 언도 기사"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지난 삼심일일에 언도하였더라"라 하여 3월 31일 사형언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 1921년 4월 9일자
개성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일제경찰은 배후를 밝히지 못하자 박재혁 의사를 살인ㆍ건물파괴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1920년 11월 2일 부산지방법원의 사형선고에 이어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무기징역의 이유는 박재혁의 "범죄는 건조물침입죄 및 살인미수죄ㆍ건조물파괴죄의 합죄로서 조금도 가석할 수는 없는 바이나 피고의 범죄동기는 타동적이고 자동적이 아님을 인정할 점과 범죄의 결과가 비교적 피해가 근소하고 인명이 미상에 그친 점, 아울러 피고가 회오의 정상이 역력한 것이므로 정상을 참작하여 사형을 감하여 무기징역에 처단한다"고 판시하였다. 검찰의 항고로 경성고등법원의 최종심의는 3월 31일 사형을 선고하여 사형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대구복심원이 '회오의 정상' 운운한 것은 대단히 정략적이었다.
일제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재판할 때 마치 반성한 것처럼 상투적으로 이런 용어를 썼다. 박재혁 의사가 '회오의 정상'이 역력하였다면 굳이 경성고등법원이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박재혁 의사는 거사의 동기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단독으로 거사했음을 진술하고 추호도 비굴하거나 선처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최종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형이 확정된 박재혁 의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거 지역인 부산형무소가 아닌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의열단원이나 부산 민족주의자들의 습격에 대비한 조처였을 것이다.
박재혁 의사는 나이는 아직 젊었으나 정신은 담대했다. 고교시절부터 비밀결사에 나서고 상하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우국열정이 넘쳤다. 그리고 생명을 조국해방투쟁에 바친들 아깝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재판정에서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충격을 받고 흐느꼈던 어머니와 여동생의 앞길이 염려되었으나 조국의 의로운 사람들의 손길이 있으리라 믿었다.
주석
1> 김석희, <박재혁의사>, <부산지역독립운동사학술회>, 부산일보사 주최, 1989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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