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15 14:08최종 업데이트 18.03.15 14:08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2011년 1월, 나는 전화기 너머 남자에게 진지하게 질문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경찰부터 쏴 죽이겠다고 말했다는데 이게 사실입니까?"


그는 한치의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맞아요. 했어요."

너무 당당하게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 건 좀 심한 것 아닙니까?"
"아니 오죽하면 그런 말을 했겠어요. 너무너무 사람을 괴롭히니까 죽이고 싶지 않겠어요?"

판결문에 나와 있는 대로 다 인정한 이 사람은 뭐가 억울하다는 걸까?

"그럼 선생님은 뭐가 억울하시다는 건가요?"
"억울하죠. 아니 죽이고 싶다고 말도 못합니까? 내가 경찰을 죽이려고 시도한 것도 아니고 화가 나서 친구들에게 홧김에 떠들었는데 그게 죄가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쯤 되면 방법이 없다. 일단 만나야 한다. 만나서 얼굴 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맥락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전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제가 속초로 한 번 내려가겠습니다."

납북된 열다섯 소년 선원

오랫 동안 잊고 있던 속초였다. 신입생 예비대학 행사를 치르며 20대의 설램을 간직했던 곳. 오징어 순대, 아바이 마을, 닭강정, 물회, 섭국, 곰치국, 영랑호, 콘도, 그리고 김용갑 열사...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속초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차를 가지고 속초를 향했다. 1월의 한계령은 눈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한계령 아래 펼쳐진 울산바위는 병풍처럼 우뚝 솟아 속초를 내려 보고 있었다. 언제나 가슴 뛰는 바다를 향해 달렸다.

그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 차를 멈추니 식당들이 가득한 속초의 '먹거리촌' 골목에 위치한 '고려면옥'이라는 식당이었다. 설마 했지만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냉면집이 맞았다. 마침 저녁 7시가 넘은 시간이라 손님은 한가했다.

자리에 앉자 따듯한 육수가 담긴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주문을 받으려 했다. 이곳에 온 사정을 이야기하자 종업원은 곧 주방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외모의 남자가 주방에서 나오며 나를 반겼다.

"오셨어요? 전화를 미리 주시지. 그래도 용케 잘 찾아오셨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 식사를 했느냐 묻는다. 아직 식사 전이라고 하자

"그럼 우리 집 냉면 한번 드셔. 내 직접 면을 뽑아서 맛있다니까요. 잠깐만 기다려요."

고려면옥 냉면 ⓒ 변상철


그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고 냉면을 뽑아 두 그릇을 말아왔다.

"한번 드셔 봐요. 입에 맞을는지. 근데 면을 좋아하시나?"
"네, 면 좋아합니다. 삼시세끼 면만 먹을 수도 있을 만큼 좋아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냉면을 자세히 보니 빨갛게 양념된 반건조 생선 같은 것이 보였다. '식해'였다. '명태식해'. 메뉴판에 적혀 있던 회냉면은 생선회가 아닌 명태식해가 들어간 냉면이었다.

"여기 냉면에 들어가는 명태식해를 우리가 직접 만들어 넣지 않소. 그래서 맛이 좋다니까."

반건조된 명태살에 찐 차조와 엿기름, 달콤한 배가 들어간 시원한 맛이었다. 몸이 찬 사람들은 1월에 식해냉면은 무리인 음식이다. 슥슥 비빈 냉면을 한 입 넣으니 가장 먼저 씹히는 배의 식감에 달콤함이 먼저 퍼지고 그 뒤로 명태살의 고소하고 매콤함이 따라온다. 면은 충분히 가는 세면(細麵)의 질긴 냉면이었다. 평양냉면의 맛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낯선 맛일 듯하다.

그도 나도 면을 좋아하는지라 몇 젓가락 되지 않아 냉면을 모두 비웠다. 나는 입맛을 가시기 위해 뜨거운 육수에 간장 몇 방울을 탔다.

"어? 육수 마실 줄 아네? 하하."

밋밋한 육수를 감칠맛 나게 하려고 늘 간장을 섞어 마셨다. 아는 사람들과 냉면을 먹으러 갈 때마다 그 모습을 보면 늘 신기해 했다.

속초의 겨울은 사람들의 발길이 일찍 끊겼다. 상을 치우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71년도였어요. 집안이 너무 어렵고 가난하니 내 나이가 15살에 내 밥벌이 하라고 해서 오징어 배를 탔어요. 나이도 어린 게 뭘 알겠어요. 지금으로 치면 중학생인데... 밥하면 밥해라, 그물 당기면 그물 당겨라, 이거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오고 그런 식이였죠."

그 해 8월말 그는 다른 배들과 같이 북한 경비정에 피랍되었다.

"안개만 끼면 북한 경비정들이 그 안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요. 그때만 해도 북한 경비정이 우리 경비정이나 군함보다 2~3배 빨랐어요. 솔직히 한국 경비정이나 해군은 그 놈들 배 나타나면 우리 어선들하고 같이 내빼는지 코빼기도 안 보여요. 우리 지켜줘야 할 놈들이 안 보이니 어선이야 다 굴비 엮이듯 잡혀서 죄다 북한으로 끌려가는 수밖에."

그가 타고 있던 제2승해호를 비롯해 북한 원산항에는 수십 척의 남한 어선이 잡혀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1년하고 7일 억류되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북한 사회 선전은 지루하기 그지 없었다. 매일 평양시내, 박물관, 금강산을 데려다주며 우월한 체제인 양 선전했지만 어린 그는 고향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아직 엄마 아빠 품이 좋을 때잖소. 너무 보고 싶은거야. 그러니 좋은 음식을 주고, 구경을 시켜준들 그게 눈에 들어오겠소?"

그런데 72년이 되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남북정상회담 할 것 같다고. 이러다가 통일이 멀지 않았다고 이런 말들을 북한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를 곧 돌려보내줄 것 같다고. 아 근데 진짜입디다. 정말 돌려보내주더라구요."

남북적십자회담의 분위기는 경색되었던 남북의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바꾸어 놓았다. 이에 화답하듯 북한은 납치했던 남한의 어선들과 어부들을 송환하기 시작했다.

"아, 원산항을 출발해서 내려오는데 믿겨지지 않더라고. 이 놈들이 또 장난질 치는 건 아닐까 의심도 들고. 그런데 고성 등대 불빛이 딱 보이는데 그제서야 마음이 탁 놓이더라니까."

그렇게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건 속초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그리고 속초시청의 회의실에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아수라였지. 시청 회의실에 가둬놓고는 한 사람씩 데려다가 조사하는데 자기 발로 걸어갔던 사람도 조사받고 돌아올 때는 축 늘어져서 두 사람한테 질질 끌려 왔어. 완전히 초주검을 만든 거지. 그러니 조사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무서워."

국민을 버리고 도망갔던 해군과 해경의 책임은 고스란히 납북된 어부들에게 되돌아갔다.

"바다에 나간 게 죄라는 거라. 우리 지켜줘야 할 해경, 해군은 다 우리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일부러 북한 넘어가려고 월선했다는 거지."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속초해경과 속초경찰은 한 편이 되었고, 조국을 찾아 내려온 어민들은 범죄자가 되었다.

"15살에 그렇게 되니 어디 취업이 됩니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또 배를 타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어요. 배를 타면 선원들이 자꾸 물어봐요. 북한은 어떠하더냐, 북한에서 뭘 보여주더냐, 북한에서 뭘 먹었냐 하고 나이 많은 선원들이 물어보니 대답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대답한 게 평양거리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고, 사람이 별로 없어서 거리가 깨끗하더라, 모란봉은 이렇더라, 금강산은 저렇더라 하고 말해 줬죠. 그냥 북한에 잡혀 있을 때 봤던거 말해준 거예요. 북한이 좋다고 자랑삼아 한 것도 아니고..."

그 증오는 어디서 왔을까

그런데 전쟁이 나면 왜 경찰부터 죽인다고 한 걸까? 그 증오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궁금했다.

"매일 따라다녀요. 배를 타면 선착장에 나타나고, 집에 가면 집에 나타나고, 식당에 가면 식당에 나타나고 하니 사람이 피가 안 마릅니까? 그런데 하루는 대진에서 오징어배를 타려고 하는데 제가 납북경력있다고 배를 못 타게 하는 거예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술을 먹고 선원숙소에 들어와서 막 소리를 질렀죠. 경찰들 다 죽이고 싶다고. 소리소리 질렀어요. 정말 집요하게 날 괴롭혔거든요."

문득 궁금한게 생겼다.

"그럼 다른 선원들이 북한에 대해 물어봐서 대답했다는 건데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선원들은 처벌 안 받았나요?"

그는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아는 선원 중에 저와 사이가 안 좋아진 선원이 있었어요. 그 선원하고 술을 먹다가 말다툼을 했는데 그 친구가 다음날 해경을 찾아가 '김춘삼이가 경찰을 살해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신고를 했더라구요.

그를 지켜주지 못했던 해경이 그를 다시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니 무슨 간첩 만드는 게 무슨 물고기 양식하듯 간첩 양식하는 것도 아니고 북한에 잡혀가도록 놔두고, 한참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니 간첩이라고 잡아가는 것이 이게 무슨 세상입니까?"

그가 북한을 찬양했다는 증언을 한 선원이 모두 3명이었다. 그런데 그 중 1명은 청각장애를 앓고 있던 선원이었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들었다고 인정할 만큼 고문은 가혹했던 것이다.

2013년 1월 8일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에서 열린 재심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승리의 '브이'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 변상철


2013년 1월, 속초법원. 그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날 그의 집에서 '명태식해냉면'을 먹었다.

"그런데 선원일 하시다가 냉면집은 어떻게 운영하시게 된 거예요?"
"감옥 갔다 와서 할 게 없잖아요. 간첩이라고 소문나서 나를 선원으로 써주는 오징어배도 없어요. 그러니 먹고살려면 뭐라도 해야 되잖아요. 처음에는 공사현장에 가서 막노동 일을 해보기 했어요.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좀 모았어요. 돈을 좀 모은 걸 가지고 뭘 할까 고민을 했지. 이 동네가 명태식해가 유명해요. 우리 집도 명태식해를 잘 해먹었어요. 그래서 냉면에 명태식해를 넣어서 음식점을 해보자 했어요."

그가 납북되었던 당시에도 식해가 있었다고 한다. 음식에는 분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음식마저도 남쪽 음식과 북쪽 음식을 가르고, 남북 서로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며 우월한 체제와 안보를 덧씌우던 시절이 있었다. 문득 지금 씹고 있는 냉면은 그 냉전의 시절을 넘어서고 있는 음식인지 궁금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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