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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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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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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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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 민청련동지회 (demoyouth) 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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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화세대교체로 새 출발한 88년 민청련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44회] 새 지도부 선출과 13대 총선

    87년 대통령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민청련은 곧바로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총회 준비에 들어갔다. 민청련은 총회를 앞두고는 각 조직 단위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총회준비위를 구성해 그동...
    18.05.31 11:13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42화1987년 대선 패배... 좌절한 민청련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43회] 노태우 당선으로 끝난 대선

    1987년 12월 16일,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기 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이로써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시작해 6월항쟁과 7·8·9월...
    18.05.18 10:51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41화1987년 구로구청 투표함 사수 사건과 김병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42회] 아, 김병곤!

    1987년 12월 대선 전야, 양 김의 단일화가 무산돼 가는 순간, 재야 상층부에서도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재야의 양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익환 목사와 박형규 목사도 이대로 가면 진다고 생각했다. 그...
    18.05.08 10:11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40화김대중의 보라매공원 유세, 독이 된 이유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41회] 민청련은 왜 김대중을 지지했나

    1987년 10월 25일 고대집회 이후 민청련은 회원총회를 열어 대통령후보 문제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11월 2일 저녁 영등포 성문밖교회 회의실에서 60여 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민청련 총회에서 '비지' 결정김대중의 평민당으로의 분당 선...
    18.04.30 10:18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9화고대 운동장에 선 김대중과 김영삼, 결과는 '예상 밖'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7] 민청련, '4자필승론'에 빠져들다

    1987년 10월 12일 민통련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지지(약칭 '비지') 결정 이후 양 김의 경쟁은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김대중이 광주와 목포를 방문해 50만 이상의 인파를 결집시키자 이에 맞서 김영삼은 부산을 방...
    18.04.23 15:30 ㅣ 민청련(demoyouth)
  • 38화"참 암울했다" 옥중 메시지 남긴 김근태의 회고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6]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양 김 후보단일화

    1987년 10월 12일, 대통령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개헌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2월 대선이 공식화됐다. 10월 27일 국민투표를 남겨 놓고 있었지만 여야 대권 후보들의 대선 행보는 10월 들어서면서 ...
    18.04.16 14:07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7화구로·영등포·성수로... 지역지부 건설 나선 민청련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5] "지역에서 청년대중을 조직하라!"

    1987년 8월의 제9차 총회 이후 청년대중운동을 모색하는 민청련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지부 건설 사업이었다. 기층 청년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일하는 지역 현장으로 내려갈 필...
    18.04.09 14:28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6화'김대중을 위한' 집회, 비극의 전조가 될 줄 몰랐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7] 격동의 시기에 민청련은 무엇을 할 것인가?

    노동자대투쟁과 민청련의 조직정비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청련 총회가 있던 8월 말까지 7,8월 두 달간은 온 나라가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진통을 겪으면서 요동치던 시기였다. 정치...
    18.04.02 10:46 ㅣ 민청련(demoyouth)
  • 35화민청련, 다시 대중 앞에 나서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6] 대중조직화 사업이라는 새로운 활동목표

    1987년, 민청련은 6.29 이후 변화된 정세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8월 8일에서 9일까지 서대문에 있던 기독교 선교교육원에서 1박2일로 정회원 대의원총회를 열었다. 이 대의원...
    18.03.26 14:12 ㅣ 민청련(demoyouth)
  • 34화1987년 민청련, 6.29선언의 기만적 본질을 지적하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5] "김근태 가둔 6.29선언은 기만이다"

    1987년 6월 29일 아침 일찍 중대발표가 있다는 예고가 있었다.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나와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정권의 유화조치가 있을 것을 예감하기는 했지만 6.29선언은 그 기대 이상이었다. 6월...
    18.03.19 13:51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3화6월항쟁 횃불, 분노한 민중을 막을 순 없었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4] 활화산 6월항쟁 속 횃불 든 민청련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선언은 국민 대중에게 좌절감과 분노를 가져다주었다. 민심이 소용돌이쳤다. 그 소용돌이를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더 한층 격화시켰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았다.'국민운동본부로 집결하라'속으로 끓고 있던 긴장감을 ...
    18.03.13 12:00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2화8차선 도로 장악, 6월항쟁의 막이 올랐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3] 6월항쟁 전야,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든 민청련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구호가 있다.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렇다. 3.1운동 때에는 '조선독립만세!'가 그랬고, 광주민중항쟁 때에는 '전두환은 물러가라!'가 그랬다. 1987년 6월항쟁 때에도 수백만 군...
    18.03.05 16:13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1화아시안게임 반대한 민청련, 왜 반성했을까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2]

    86아시안게임을 왜 반대하는가민청련 7차 총회가 끝난 뒤 1986년 9∼10월의 가장 큰 이슈는 아시안게임 반대운동이었다. 아시안게임은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됐다. 민청련의 입장은 아시안 게...
    18.02.27 10:14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30화1986년, 어둠을 뚫고 일어난 민청련 새 지도부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1]

    민청련은 1986년 9월에 7차 총회를 열었다. 7차 총회에서는 조직 문제가 주요 이슈였다. 그 결과 '대폭적 구조 개편'이 단행됐다. 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관심을 모았다. "운동을 하려면 3차...
    18.02.20 10:02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29화군사독재와 타협 없다! 1986년 헌법특위 반대 운동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30]

    격렬했던 1986년 5월 투쟁 이후에 갑자기 정치 정세가 바뀌었다. 전두환 정권과 야당 정치세력 사이에 타협 정국이 조성된 것이다. 이른바 '헌법특위 국면'이 도래했다. 발단은 미국이었다. 1986년 5월 8...
    18.02.12 14:02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28화박해를 무릅쓰고 5월투쟁에 헌신한 청년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9]

    동창회, 영업부, 산악부라고 부른 세 가지 조직AB논쟁의 결과 조직이 반 토막 났다. 문제가 심각했다. 단지 구성원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은 회원들이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획기적인 대...
    18.02.06 09:38 ㅣ 민청련(demoyouth)
  • 27화밤샘 공방전까지... 민청련이 마주한 치열한 논쟁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8] 전면적 탄압, 그리고 AB논쟁

    민청련의 최고 의결기구는 규약에 따라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였다. 이 규정은 충실히 지켜졌다. 독재정권의 탄압에 쫒기면서도, 어김없이 총회를 열었다. 제6차 총회는 1986년 3월 1일에 열었다.제6...
    18.01.29 14:42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 26화젖먹이 홀로 돌보는데...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다

    [투사들의 이야기, 민청련의 역사 27] 대탄압에 움츠러든 운동권

    대탄압 탓에 민청련은 위기에 몰렸다. 고문 수사에 반대하는 맹렬한 대응 운동에 나섰지만, 타격을 받고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력을 제공하던 공개 간부를 한꺼번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김근태 전 의...
    18.01.23 14:46 ㅣ 민청련동지회(demo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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