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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개신교의 운명이 바뀐 날

    [한국 개신교의 명암] 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 찬성한 목사들, 강력 항의한 선교사들

    등록 2026.09.07 07:20수정 2026.09.07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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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개신교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들을 통해 한국 개신교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한국 사회에서 종교, 특히 개신교의 적절한 위치와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편집자말]
    卄七回 장로교총회에서 금일 신사참배를 가결

    입칠회 장노교총회 제二일인 十일 오전 9시부터 예정과 같이 순서를 진행하고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가 이러나자 평양장노 박응율 목사의 발의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오 국가의식이다' 하자 평서 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와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엿다. 이에 방위량, 평서교회 선교사 원세열, 한부선 선교사 등이 반대하엿으나 그대로 통과되매 三十여 선교사는 퇴장하엿다. 이에 회장의 가부가 잇으매 대다수의 찬성으로 회장으로부터 신사참배의 선언을 나리엇다. 뒤를 이어 총회부회장 김길창 씨의 인솔하에 각 노회장 二十八명이 평양신사로 가서 참배하엿다. - <동아일보> 1938. 9. 11.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일제는 한국 내 최대 교세를 자랑하던 장로교회의 신사참배 가결을 식민지 사상 통제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수개월 전부터 치밀한 공작과 사상 탄압을 펼쳤다.

    일제 경찰은 총회가 열리기 전, 신사참배에 강력히 반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표적 지도자들(주기철, 이기풍, 김선두 목사 등)을 모두 사전 체포·구금했다. 동시에, 각 지역 노회에서 선출된 총대 목사와 장로들의 집과 교회를 사복 경찰이 24시간 감시했다.


    참배에 반대하거나 발언하려 할 경우 "총회장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 "가족과 교회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했고, 총대들이 평양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부터 총회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경찰이 밀착 동행하며 감시했다. 서문밖교회 안팎은 예배당이라기보다 삼엄한 취조실처럼 무거운 공포감이 감돌았다.

    다음 날인 9월 10일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다. 총회장 안에는 무장한 정복 경찰 및 사복 경찰 수백 명이 단상과 통로, 총대석 사이사이에 배치되었고, 평양경찰서장이 직접 총대석 전면에 앉아 총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교사들을 제외한 일반 교인과 취재진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으며, 오직 경찰의 허가를 받은 총대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회의 안건들은 일제가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기습적으로 처리되었다. 평양 노회장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를 긴급 제안하자,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가 동의와 제청을 했다. 신임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이 안건에 찬성하시면 '예' 하시오"라고 묻자, 미리 포섭된 몇몇 친일 목사들과 경찰의 압박에 질린 일부가 '예' 하고 답했다.

    의장이 '부'(아니오)를 물으려 할 때", 총회장 곳곳에 서 있던 무장 경찰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총대들을 위협적으로 노려보았다. 결국, 반대를 묻는 절차는 생략되었고, 총회장은 즉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며 의사봉을 두드렸다.

    현장에 참석해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한국명 방위량)와 아서 블레어 등은 총회법과 의사 진행 규칙에 전적으로 위배된다며 강력히 발언권을 요청하고 항의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발언권을 요구하는 선교사들의 입을 손으로 막고 힘으로 제압하여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의 선교사들이 기습적이고 강압적인 가결 과정에 분통을 터뜨렸으나, 경찰의 물리적 통제 앞에서 가결 선언을 막지 못했다. 이런 혼란 중, 총회 서기가 성명서를 낭독했다.


    아등(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써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13(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홍택기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평양신사참배하는장로회총회대표"
    ▲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평양신사참배하는장로회총회대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가결 선언이 내려진 직후인 낮 12시경, 총회 간부진과 각 노회 대표 20여 명은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평양 신사에 집단으로 참배했다. 이후, 총회 지도부와 찬성파는 교단 차원에서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등을 결성하여 국방헌금 모금, 애국기 헌납, 시국 기도회 개최 등 일제의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했다.

    하지만 신사참배는 장로교만의 예외적인 단독행위가 아니었다. 다른 교회들도 비슷한 경로를 따른 것이다. 장로교와 함께 한국 개신교의 두 축을 이루었던 감리교는 감독제라는 중앙집권적 조직 특성과 '국가 의례'라는 일제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1936~1938년에 걸쳐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이후 '조선감리교단'으로 개편되며 황민화 운동에 적극 동원되었다.


    성결교회는 일제의 강압으로 신사참배를 수용했으나, 핵심 교리인 '재림'(再臨) 신앙이 문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천황과 지상 정권을 심판한다"는 가르침이 국가 신도 체제를 위협한다고 본 일제에 의해 1943년 교단이 강제 해산되고 교회 재산이 몰수된 것이다.

    하지만 동아기독교(현 침례교)는 달랐다. 신사참배와 천황 참배, 병역 동원을 교리적으로 전면 거부하여, 1942년 펜윅 선교사의 후계자였던 노재천 목사 등 지도부 30여 명이 체포되었고, 교단도 1944년 강제 해산당했기 때문이다.

    신도(神道)와 신사참배

    신도는 일본의 자생적인 민속 종교이자, 일본인의 삶과 문화, 국가 정체성에 깊게 뿌리내린 전통 신앙이다. 창시자나 경전, 명확한 교리가 없으며, 자연물이나 조상, 정령 등 만물에 신이 거한다는 다신교적 애니미즘(Animism)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1968) 이후, 일제는 신도를 단순한 전통 종교에서 탈피시켜 국가 통치의 핵심 이념이자 국민사상 통제의 도구로 재편했다. 이를 '국가신도(國家神道)'라 부르며,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일본의 근대화, 천황제 절대화, 그리고 대외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틀로 작동했다.

    일제는 조선에서 통치 방식의 변화와 대외 침략 전쟁의 확대에 맞춰 점점 강압적인 형태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10년부터 1920년대에는 '포교규칙'과 '신사규칙'을 제정하여 전국의 주요 거점에 신사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서울 남산에 관제 최상위 신사인 '조선신궁'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1925년 완공하고, 일본의 태양신(아마테라스 오오카미)과 메이지 천황을 모셨다. 이 시기까지는 관공서나 관립 학교 중심으로 제한적 참배가 이루어졌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는 황민화 정책과 결합해 조직적이고 강제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을 전시 후방 기지화하기 위해 전면적인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학교, 관공서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인, 종교 단체, 농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민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한 것이다. 각 가정마다 일본 신의 부적(신사츠)을 모시는 '신단(神棚)'을 설치하도록 강요했다.

     20세기 초 서울에 있었던 조선신궁(1925-1945)
    ▲ 20세기 초 서울에 있었던 조선신궁(1925-1945) 위키미디어 공용

    저항과 탄압

    1938년 주요 교단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가운데서도, 조선 기독교계는 미션스쿨 자진 폐교, 지하 조직 결성, 옥중 순교를 통해 타협 없는 항일 저항사를 써 내려갔다. 일제가 학교 현장에서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자, 미국 북장로교 및 남장로교 선교회와 기독교 교육자들은 "우상숭배와 타협하는 교육을 하느니 학교를 닫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평양과 서울에서 북장로교 계열의 학교들인 평양 숭실학교(숭실전문·숭실중) 교장이던 조지 매큔(윤산온) 박사가 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여 1936년 파면·추방당한 후,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1938년 자진 폐교했다. 서울 정신여학교 등도 당국의 압박 속에 교육 기능이 마비되는 시련을 겪었다.

    호남 지역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회는 가장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1937년 9월, 전주 신흥학교·기전여학교, 광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순천 매산학교 등 호남 지역 10개 미션스쿨을 폐교한 것이다. 일제의 재단 양도 요구도 끝까지 거부하며 강제 몰수를 견뎌냈다.

    또한, 지하 조직 결성과 전국적 저항 운동도 시작되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의 강제 가결 이후, 친일화된 공식 교단을 이탈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지하에서 비밀 저항망을 형성한 것이다. 한상동, 주기철, 주남선, 최덕지, 이인재, 조수옥 등은 경남,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등 전국을 잇는 비밀 연락망을 구축했다.

    동시에,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과 선을 긋고, 참배하지 않는 신도들을 모아 가정교회 형태의 지하 교회를 운영하며 순결한 신앙을 유지한 이들도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의 죄악성을 고발하고 참배 거부를 독려하는 유인물을 전국 각지로 비밀리에 배포했으며, 수감자 가족 구제 및 지하 조직 운영 자금을 모금했다.

    이런 저항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다. 일제 경찰이 1940년 7월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대검거 작전을 펼쳐 신사참배 거부 세력을 대대적으로 정죄·구금한 것이다. 그 결과, 약 2000여 명 이상의 성도와 교역자가 투옥되었으며, 200여 개 교회가 강제 폐쇄되었다.

    참배를 교리적으로 거부한 성결교, 침례교(동아기독교), 안식교 등은 교단 자체가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주기철 목사(1944년 순교)를 비롯해 최봉석(최권능) 목사, 박관준 장로 등 50여 명의 지도자들이 혹독한 고문과 악형 끝에 옥중에서 순교했다.

    해방, 분열, 청산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평양형무소 등 전국 각지 감옥에서 풀려난 '출옥성도'(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조수옥 등 20여 명)들은 신사참배로 더러워진 한국 교회의 영적 회복을 위해 강력한 교회 쇄신(재건)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출옥성도들의 쇄신안은 신사참배에 동조했거나 적극 협력했던 기존 장로교 총회 다수파 지도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 없는 교회 재건은 불가능하다"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자, 기존 교단 지도부는 "일제의 칼날 아래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시국적 선택이었다"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유야무야 넘어가려 했고, 심지어 출옥성도들을 "독선적이고 교만한 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인위적인 교역자 징계 및 자숙 요구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신사참배로 오염된 기존 신학교를 대신해 신학의 순수성을 지킬 목회자를 양성하고자 1946년 9월 부산에서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총회 다수파는 고려신학교를 공식 신학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려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거나 축출하는 등 행정적 제재를 가했다.

    이처럼 총회로부터 제명당하고 노회 복구가 무산되자, 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 중심 세력은 1952년 9월 진주성남교회에서 '총노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의 시작이다. 또한, 일부 출옥성도들은 고신 교단과 별도로 1954년 한국예수교장로회(재건) 교단을 세웠다.

    1938년 9월 10일은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일제의 압력 앞에 신앙의 본질을 타협·훼손하여 지울 수 없는 배교의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타락한 교권과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신앙적·역사적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발생한 교단 분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양하고, 그것이 남긴 상처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그것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정직하게 성찰한다면, 여러 문제로 위기에 처한 한국 개신교에 오히려 소중한 역사적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룩진 역사도 후대의 진정한 반성과 현명한 선택을 통해 얼마든지 소중한 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이자 백향나무교회 담임목사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B.A.),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예일대학교(S.T.M.), 드루대학교(Ph.D.)에서 공부했다. <전광훈 현상의 역사적 기원> 등을 썼고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등을 번역했다.
    #신도, #신사참배 #한국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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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태어나서 부평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B.A.), 예일신학대학원(S.T.M.), 드류대학교(M.Phil.& Ph.D.)에서 교회사를 공부했으며, 건신대학원대학교를 거쳐,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 백향나무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부평에서 서울을 오가며 살고 있고, 아내 숙경과 세 딸 수연, 소연, 서연과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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