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 서울에 있었던 조선신궁(1925-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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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과 탄압
1938년 주요 교단 총회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가운데서도, 조선 기독교계는 미션스쿨 자진 폐교, 지하 조직 결성, 옥중 순교를 통해 타협 없는 항일 저항사를 써 내려갔다. 일제가 학교 현장에서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자, 미국 북장로교 및 남장로교 선교회와 기독교 교육자들은 "우상숭배와 타협하는 교육을 하느니 학교를 닫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평양과 서울에서 북장로교 계열의 학교들인 평양 숭실학교(숭실전문·숭실중) 교장이던 조지 매큔(윤산온) 박사가 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여 1936년 파면·추방당한 후,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1938년 자진 폐교했다. 서울 정신여학교 등도 당국의 압박 속에 교육 기능이 마비되는 시련을 겪었다.
호남 지역에서 활동한 남장로교 선교회는 가장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1937년 9월, 전주 신흥학교·기전여학교, 광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목포 정명여학교, 순천 매산학교 등 호남 지역 10개 미션스쿨을 폐교한 것이다. 일제의 재단 양도 요구도 끝까지 거부하며 강제 몰수를 견뎌냈다.
또한, 지하 조직 결성과 전국적 저항 운동도 시작되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의 강제 가결 이후, 친일화된 공식 교단을 이탈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지하에서 비밀 저항망을 형성한 것이다. 한상동, 주기철, 주남선, 최덕지, 이인재, 조수옥 등은 경남,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등 전국을 잇는 비밀 연락망을 구축했다.
동시에, 신사참배를 한 목회자들과 선을 긋고, 참배하지 않는 신도들을 모아 가정교회 형태의 지하 교회를 운영하며 순결한 신앙을 유지한 이들도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신사참배의 죄악성을 고발하고 참배 거부를 독려하는 유인물을 전국 각지로 비밀리에 배포했으며, 수감자 가족 구제 및 지하 조직 운영 자금을 모금했다.
이런 저항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다. 일제 경찰이 1940년 7월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대검거 작전을 펼쳐 신사참배 거부 세력을 대대적으로 정죄·구금한 것이다. 그 결과, 약 2000여 명 이상의 성도와 교역자가 투옥되었으며, 200여 개 교회가 강제 폐쇄되었다.
참배를 교리적으로 거부한 성결교, 침례교(동아기독교), 안식교 등은 교단 자체가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주기철 목사(1944년 순교)를 비롯해 최봉석(최권능) 목사, 박관준 장로 등 50여 명의 지도자들이 혹독한 고문과 악형 끝에 옥중에서 순교했다.
해방, 분열, 청산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평양형무소 등 전국 각지 감옥에서 풀려난 '출옥성도'(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조수옥 등 20여 명)들은 신사참배로 더러워진 한국 교회의 영적 회복을 위해 강력한 교회 쇄신(재건)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출옥성도들의 쇄신안은 신사참배에 동조했거나 적극 협력했던 기존 장로교 총회 다수파 지도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출옥성도들이 "회개 없는 교회 재건은 불가능하다"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자, 기존 교단 지도부는 "일제의 칼날 아래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시국적 선택이었다"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유야무야 넘어가려 했고, 심지어 출옥성도들을 "독선적이고 교만한 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인위적인 교역자 징계 및 자숙 요구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신사참배로 오염된 기존 신학교를 대신해 신학의 순수성을 지킬 목회자를 양성하고자 1946년 9월 부산에서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총회 다수파는 고려신학교를 공식 신학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려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거나 축출하는 등 행정적 제재를 가했다.
이처럼 총회로부터 제명당하고 노회 복구가 무산되자, 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 중심 세력은 1952년 9월 진주성남교회에서 '총노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의 시작이다. 또한, 일부 출옥성도들은 고신 교단과 별도로 1954년 한국예수교장로회(재건) 교단을 세웠다.
1938년 9월 10일은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일제의 압력 앞에 신앙의 본질을 타협·훼손하여 지울 수 없는 배교의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타락한 교권과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한국 개신교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신앙적·역사적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발생한 교단 분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양하고, 그것이 남긴 상처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그것이 남긴 역사적 교훈을 정직하게 성찰한다면, 여러 문제로 위기에 처한 한국 개신교에 오히려 소중한 역사적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룩진 역사도 후대의 진정한 반성과 현명한 선택을 통해 얼마든지 소중한 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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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서 부평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B.A.), 예일신학대학원(S.T.M.), 드류대학교(M.Phil.& Ph.D.)에서 교회사를 공부했으며, 건신대학원대학교를 거쳐,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원장, 백향나무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부평에서 서울을 오가며 살고 있고, 아내 숙경과 세 딸 수연, 소연, 서연과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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