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1989. 5. 기형도 사후 2개월뒤 발간된 시집. 귀한 초판본으로 47년째 가지고 있다.
서광식
유고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
80년대도 다 가는 1989년 3월 시단과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당선한 시인이자 중앙일보 기자인 기형도의 갑작스러운 타계소식.
그리고 몇 달 뒤, 시집 한 권이 등장했다.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 5.발간). 생전 시집을 내지 않았던 시인에게 이 시집은 유일한 시집이 되었다. 시집은 초간본 발간 3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서점에서 꾸준히 팔린다.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읽히고 있다.
연보를 보면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옹진군에서 태어나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으로 이사해 1989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대중교통이 지금 같지 않았던 시절, 경기 시흥에서 서울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다녔다.
뒤에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중앙일보사 기자로 일하면서 그는 집과 학교, 집과 직장의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오갔을까. 매일 창밖의 어떤 풍경을 만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시 '안개' 부분
시 '안개'에서 그 단초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유신 말기의 부조리와 부패의 냄새가 온 시대를 뒤덮었던 1970년대 말. 그리고 또 한 번의 쿠데타에 이은 무도한 권력의 폭력에 온 국민이 질식 상태에 있던 암울했던 1980년대 초. 전국 어느 곳에서나, 샛강에 자욱이 피어오르던 안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얼굴이자 풍경이 아니었을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군복무 30개월, 지방근무 약 5년 제외) 나 같은 사람에게 편도 1시간이 넘는 장시간 통학 혹은 통근은 낯설다. 3일, 경기 광명시 일직동 기형도문학관을 가는 길은 기형도가 생전 학업과 생계를 위해 오갔던 그 길 위에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 길 위의 풍경들을 눈에 담아본다.

▲기형도문학관 지하철7호선 철산역 버스를 타고 10분쯤 걸려 문학관에 당도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찍은 문학관 전경.
서광식
"부재하는 현존, 현존하는 부재"
기형도문학관은 2017년 세워졌다. 사후 28년만이다. 살아있다면 57세다. <입 속의 검은 잎> 시집 말미에 김현(서울대교수, 문학평론가)은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라는 제하의 해설에서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라고 적었다.
기형도문학관을 둘러보며 든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시인의 육체는 사라졌으나 그가 남긴 시들은 오래 살아남아 지금도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기형도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 문학관 곳곳에서 시인의 생애와 육성을 느낄 수 있다.
기형도문학관은 먼저 시인 기형도의 시인이 되기 전과 시인이 되고 난 후를 연대기로 정리해 보여준다. 연대기가 보여주는 간략한 이력으로 기형도의 내면과 시적변화를 따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 '<이야기 하나 유년의 윗목>(어린 날), <이야기 둘 은백양의 숲>(대학 시절), <이야기 셋 저녁 정거장>(졸업 후)'을 주의깊게 따라가다보면 시인의 치열했던 삶과 시작에의 열정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 셋 저녁 정거장> 졸업후 기자로 일하며 시를 쓰던 시인의 고뇌를 보여주는 공간
서광식
다시 김현의 해설을 빌려오면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도 동의하는 바, 좋은 시인 기형도의 시가 오늘날까지 잊히지 않고 거듭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시인과 시는 분리될 수 있을까' 하는 오랜 물음에 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속임수는 쉽게 들통나기 마련이다. 쉽게 들킨다. 시만 잘 쓰는 사람은 시 재주꾼이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시인은 아니다. 이름만 시인인 거짓 시인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좋은 시인을 만나는 일이란 어렵다. 좋은 시를 만나기는 더 어렵다.
12월 13일까지 <다시, 그 길 위의 우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획전
기형도는 1985년 등단 후 스물아홉해의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문단 경력은 5년 남짓에 불과하다. 사망 직후 <입 속의 검은 잎>에 이어,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문학과지성사, 1994),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1999)이 나왔다. 2017년 기형도문학관 개관기념 <기형도 전집>(특별한정판)을, 2019년 기형도 30주기를 맞아 기형도 시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냈다.

▲기형도문화공원 기형도문학관을 품고있는 문화공원. 기형도의 시를 돌에 새겨 세워놓았다.
서광식
기형도문학관에서는 지난 6월 2일부터 <다시, 그 길 위의 우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획전을 열고 있다. 12월 13일까지. 문학관을 나와 옆으로 돌아서면 늙지 않는 기형도의 사진과 약력 그리고 널리 알려진 시 '빈집'과 '엄마걱정'이 나란히 선 벽이 나온다.
벽을 왼쪽에 두고 쭉 걸어가면 기형도문화공원이다. '오래된 서적', '질투는 나의 힘' 등 작품들이 세워져있는 '시 길'을 걸을 수 있다. 숲은 아직 푸르다.

▲ 기형도문학관 측면 기형도의 사진과 약력, 그리고 시 '엄마걱정' '빈집'이 새겨진 벽이 있다.
서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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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밭을 갈다 자주 무릎이 꺾이는 늙은소입니다.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합니다. 젊어서 시를 썼고, 지금은 이런저런 잡문을 써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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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기형도가 짧은 삶 속에 남기고 간 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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