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7월 16일 오후 서울 세종로 네거리 원표공원과 덕수궁 길을 오가며 열린 '슬럿워크(Slutwalk) 잡년행진 - 벗어라 던져라 잡년이 걷는다'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우리는 아무 옷이나 입을 권리가 있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우성
수사기관이 성폭력 문제의 해결 주체가 아니라 문제의 일부일 수 있다는 인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1년 1월 24일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교 오스굿홀 로스쿨에서 열린 안전 포럼에서 생귀네티 순경은 여성이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들었다는 단서를 붙인 뒤 발언을 이어갔다.
이 발언의 문제는 표현의 무례함이 아니다. 성범죄 발생의 책임을 피해자의 옷차림에 연결하는 논리는 가해 행위를 피해자가 관리했어야 할 위험으로 재분류한다. 이 재분류가 전제되면 수사의 질문은 가해자가 무엇을 했는가에서 피해자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로 옮겨간다. 더구나 그 말이 나온 자리는 사석이 아니라 대학이 학생 안전을 위해 마련한 공식 교육의 자리였고, 말한 사람은 사건이 접수됐을 때 최초 진술을 받고 증거를 수집하며 어떤 혐의를 적용할지 판단하는 직군의 구성원이었다. 통념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통념을 사건 처리에 반영할 위치에 있는 경찰이 그 통념을 공적인 자리에서 확인한 것이다.
분노가 향한 지점은 여기였다. 같은 해 4월 3일 토론토 퀸스파크에 3천여 명이 모여 경찰본부까지 행진했다. 주최 측이 예상한 규모는 백 명 남짓이었다. 시위가 내건 문구 가운데 하나는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Because We've Had Enough)'였다. 참가자들이 문제 삼은 것은 한 경찰관의 실언이 아니라 그 실언이 확인해준 인식의 보편성이었다. 개별 사건에서 각자 겪었던 일이 담당자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조직 안에 공유된 판단 틀의 결과였다는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났고, 그 확인이 이미 누적돼 있던 반발을 한 시점에 모았다. 예상의 서른 배가 모인 것도, 운동이 몇 달 만에 200개가 넘는 도시로 번진 것도 이 축적을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진단은 경찰 조직 내부에서도 일부 수용됐다. 당시 토론토 경찰청장 빌 블레어는 해당 발언이 훈련의 문제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그런 낡은 사고가 아직 소속 경찰관들 사이에 남아 있다면 교육과 감수성 제고가 계속 필요하다는 뜻이며,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것은 책임이 놓일 자리가 아니라는 취지였다. 한 사람의 실언으로 정리하지 않고 조직의 문제로 인정한 발언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해 잡년행진이 열렸으나 계기는 달랐다. 2011년 5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생 3명이 동기 여학생을 집단 성추행하고 그 장면을 촬영한 사건에 대해 학교가 9월까지 징계를 미루자, 6월부터 고려대 앞에서 1인 시위가 이어졌고 7월 16일 행진이 진행됐다. 토론토의 표적이 경찰이었다면 서울의 표적은 대학과 사회였다. 이후 한국의 성폭력 대응 운동은 가족, 직장, 문화예술계, 교육계 등 단위의 은폐 구조를 우선 문제 삼았고, 수사기관 자체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15년 전의 사건을 지금 다시 꺼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슬럿워크가 제기한 것은 경찰관의 말버릇이 아니라 통념이 사건 처리에 개입하는 경로였다. 어떤 사건이 수사할 가치가 있는가, 어떤 진술이 믿을 만한가, 어떤 혐의를 적용할 것인가. 이 판단들은 지금까지 검사의 보완수사라는 사후 절차를 통해 한 차례 더 검토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슬럿워크가 던진 질문은 수사적 물음이 아니라 한국 형사사법의 구조적 조건이 됐다.
누락된 혐의를 되살린 절차
그리고 장윤기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피의자 장윤기를 강간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검찰의 보완수사 과정에서 성범죄 의도를 뒷받침할 증거물이 폐기된 정황이 확인됐고, 폐기에 관여한 것으로 지목된 인물은 피의자의 아버지이자 현직 경찰관인 경감이다.
경찰청 특별수사단은 당시 광산경찰서장과 형사과장, 수사팀장을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입건했다. 앞서 이 사건을 '장윤기 아버지 사건'으로 부르자고 제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당시 형사과장 측 변호인은 성범죄 혐의 적용을 위해 국가수사본부에 별건 병합 수사를 세 차례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있어, 책임 소재는 아직 수사 중이다. 확정된 사실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누락된 성범죄 혐의를 다시 검토하게 만든 절차가 이번에 폐지된 보완수사였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일부 경찰관의 유착 문제로 한정하면 제도 논의는 진전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기자회견에서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의 잘못된 통념과 싸워야 하며, 어느 수사관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운'에 맡겨져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 범죄 기소율이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가정폭력은 신고해도 대부분 현장종결로 처리돼 입건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도 함께 들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2021년 이후의 이원화가 기관 간 책임 떠넘기기와 지연으로 귀결됐다고 평가했다.
통념과 싸워야 한다는 말은 이 글이 앞에서 다룬 2011년의 문제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 토론토에서 드러난 것이 발언 단계의 통념이었다면, 최 사무처장이 말한 것은 그 통념이 입건 여부와 혐의 적용과 송치 결정에 반영되는 단계다. 생귀네티의 발언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범죄예방 교육의 자리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같은 층위에서 읽는 것이 타당하다.
권한 배분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제
수사 권한을 어느 기관이 갖느냐로 정리되지 않는 영역도 있다. 인천 강화군의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색동원 성폭력 사건에선 구어 소통이 어려운 중증장애여성 피해자들의 경험이 조사 과정에서 제대로 청취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지난 6월 법무부가 펴낸 '여성·아동·장애인 대상 범죄 보완수사 우수사례집'에 수록됐다.
보완수사의 성공 사례로 정리된 사건에서조차 일부 피해자의 피해는 혐의로 구성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결과는 검사가 보완수사를 했는지 여부로 설명되지 않는다. 구어로 진술하기 어려운 사람의 의사표현을 수사 절차가 어떻게 청취하고 기록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수사 주체가 경찰이든 검찰이든 같은 자리에서 멈춘다. 보완수사권 폐지에 반대하는 쪽도, 폐지를 개혁의 완성으로 보는 쪽도 이 지점은 설명하지 못한다.
경찰개혁의 내용을 제안한다

▲형사소송법 개정안 반대 무제한 토론하는 주호영 의원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이 30일 국회에서 열린 7월 임시국회 제3차 본회의에서 여당 주도로 법사위를 통과해 상정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개혁의 내용은 규탄이 아니라 제도의 언어로 제시되어야 한다.
첫째, 전건송치의 조속한 입법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아동학대, 가정폭력, 성범죄, 아동성범죄, 스토킹, 장애인학대, 노인학대 등 7대 범죄에 대해 경찰의 혐의 판단과 무관하게 사건 전체를 검찰에 송치하도록 하는 법안을 8월 중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참가자들도 여성폭력 사건의 전건송치를 요구 항목에 넣었다.
그러나 보완수사권 폐지는 확정된 반면 전건송치는 아직 예고 단계이며, 현행법상 전건송치가 적용되는 범죄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둘뿐이다. 범죄 유형으로 보호 대상을 나누는 방식 자체에 대한 지적도 있다. 검찰개혁추진단 자문위원을 지낸 양홍석 변호사는 그동안 보완수사로 해결되던 문제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미루는 방식으로 바뀌어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했고, 최근 사의를 표명한 정성호 법무부 장관도 앞서 법사위에서 경제범죄와 보이스피싱 등이 대상에서 빠진 점을 들어 범위에 대한 추가 검토를 요청했다.
둘째, 1차 수사기관의 인력과 예산 확충이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요구 목록 첫머리에 둔 것도 인력과 예산 확보를 통한 1차 수사기관의 신속하고 정확한 수사 기능이었다.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이해하는 전담 인력 없이 권한 배분만 조정하면 부실수사는 그대로 남는다. 1차 수사기관이 사실상 최종 수사기관이 된 조건에서는 이 문제가 더 직접적으로 결과에 반영된다. 색동원 사건이 보여주듯, 여기에는 장애인 피해자의 진술을 청취할 수 있는 전문성과 인력이 포함되어야 한다.
셋째, 이의신청 제도의 재설계다. 손솔 진보당 의원은 이의를 제기해도 같은 조직이 다시 사건을 맡고, 경찰과 검찰 사이에서 책임이 오가는 동안 피해자는 자신의 사건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사후 통제가 사실상 이의신청 하나로 좁혀진 조건에서, 불복 절차를 결정 주체와 같은 조직이 처리하는 구조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넷째, 피해자의 절차 참여권 보장이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권리구제 신청을 위한 사건기록 열람·등사권 확대를 요구했다. 공동기자회견문은 절차참여권이 헌법상 기본권으로 실현돼야 함에도 수사와 수사종결, 이의신청, 보완수사, 기소 여부, 재정신청, 공소제기, 공소유지에 이르는 전 과정이 복잡해 사실상 접근이 제한될 것을 우려했다. 자기 사건의 진행 상황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불복을 요구하는 것은 권리 보장이 아니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는 제도적으로 완결됐다. 그러나 여성단체가 기자회견문에서 지적했듯,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형사사법절차는 여전히 해결책이라기보다 족쇄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1년 토론토의 슬럿워크는 성범죄 수사에서 통념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경찰 조직 스스로 인정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한국은 그 통념을 걸러낼 마지막 절차를 없앤 상태에서 이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다뤄야 한다.
국민의힘은 보완수사권이 피해자를 지켜주는 수단이라고 했고, 소속 의원들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7대 범죄 전건송치를 8월에 처리하겠다고 했다. 양쪽 모두 피해자를 정치적 다툼의 근거로 삼았다. 2011년 잡년행진 기획단으로 거리에 섰던 사람으로서, 나는 양쪽의 행보를 지켜보고 그 이름을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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