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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OO아' 이런 말이 그냥 튀어나와요" 열다섯 남학생들의 고백

영성중 학생들의 '정직한' 서약... "혐오표현, 이제부터는 멈춰보겠습니다"

등록 2026.07.19 10:55수정 2026.07.1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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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서약서를 작성하는 학생들 “재미로라도 남의 아픔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겠습니다.” 약속은 한 사람의 다짐에서 학교의 공기가 되어 갔다.
▲존중 서약서를 작성하는 학생들 “재미로라도 남의 아픔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겠습니다.” 약속은 한 사람의 다짐에서 학교의 공기가 되어 갔다. 이종관

사인펜을 쥔 손이 잠깐 멈칫했다.

캠페인에 참여한 2학년 남학생은 존중 서약문을 한 번 소리 내 읽더니, 옆 친구를 툭 치며 "야, 이거 진짜 지켜야 되는 거임?"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이름을 꾹꾹 눌러 적었다. 던지는 말은 거칠었는데, 글씨는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손끝을 조금 오래 바라봤다. 열다섯 살의 허세와 그 밑에 깔린 진심이, 한 획 안에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3년째 교단에 서 있지만, 남중의 언어는 여전히 나를 긴장시킨다. 쉬는 시간 복도에 서 있으면 욕설이 인사처럼 오간다. "야 이 OO아"로 시작해 서로의 외모를, 성적을, 집안을, 게임 실력을 놀리는 말이 쉴 새 없이 부딪친다. 교실 뒤에서는 누군가의 별명을 두고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그 말의 절반은 사실 친밀함의 표현이다. 거칠게 부딪치며 정을 확인하는 게 이 나이 사내아이들의 방식이라는 걸, 나는 안다.

문제는 나머지 절반이다. 웃자고 던진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그대로 박히고, "장난인데 왜 진지해"라는 한마디가 그 상처 위에 한 번 더 얹힌다. 놀리는 아이는 기억조차 못 하는 말을, 놀림당한 아이는 밤마다 곱씹는다. 같은 말을 누구는 애정으로, 누구는 칼로 받는다. 그 경계는 말한 사람이 아니라 들은 사람의 자리에서 갈린다.

그 경계를 아이들 스스로 감각하게 하는 일, 그것이 교사인 나를 오랫동안 붙들어 온 숙제였다.

금지의 언어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존중 캠페인에 참여하는 남중 학생들 말이 앞서고 몸이 먼저 나가는, 장난과 시비의 경계가 늘 아슬아슬한 공간, 이곳은 남자중학교다.
▲존중 캠페인에 참여하는 남중 학생들 말이 앞서고 몸이 먼저 나가는, 장난과 시비의 경계가 늘 아슬아슬한 공간, 이곳은 남자중학교다. 이종관

교직 초년의 나는 '하지 마'라는 말을 참 많이 했다. 그 말이 아이를 바꾼 적은 거의 없었다는 걸 깨닫는 데 몇 해가 걸렸다. 혐오 표현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그런 말 쓰지 마라"라고 막아서면, 아이들은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교사가 없는 곳으로 말을 옮길 뿐이다.


그래서 올해 우리 학교 역사동아리 '피스메이커스' 아이들과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나는 한발 물러서 있기로 했다. 어른의 훈계 대신 또래의 언어로, 금지 대신 체험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캠페인 부스는 그렇게 아이들 손에서 만들어졌다. 가르치려는 부스가 아니라, 느끼게 하려는 부스였다.

기획 회의에서 아이들이 가장 오래 붙든 낱말은 뜻밖에도 '재미'였다. 재미가 없으면 남중 아이들은 부스 앞에 서지도 않는다는 걸, 자신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현실 감각이 반가웠다. 교사가 짜 준 프로그램이었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눈높이였다.


동아리 2학년 김OO의 말이 그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솔직히 '존중하자' 이러면 애들 다 도망가요. 그래서 게임처럼 만들었어요."

그러더니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근데 준비하면서 제가 제일 찔렸어요. 저도 게임하다가 친구한테 막말 많이 했거든요. 문구 짜다가 '어, 이거 나잖아' 했어요."

가르치는 자리에 세웠더니, 배우는 건 오히려 그 아이였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농담이야? 조롱이야? 경계선 투표존에서 스티커를 붙이는 학생들 "장난이면 조롱이 아니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무엇이 문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농담이야? 조롱이야? 경계선 투표존에서 스티커를 붙이는 학생들 "장난이면 조롱이 아니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무엇이 문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종관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세대의 조롱을 '무지'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오래전부터 느껴 왔다. 아이들은 몰라서 조롱하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그 앎이 몸에 닿지 않아서 조롱한다.

그날 부스에서 그 사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OX 퀴즈는 혐오와 조롱에 관한 문항을 아이들이 직접 읽고 답을 맞혀 보는 방식이었다. "장난이라고 하면 조롱이 아니다"라는 문항에,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X를 골랐다. "온라인 밈이면 따라 써도 된다"에도, "역사적 참사를 드립 소재로 쓰는 것도 표현의 자유다"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답을 몰라서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식은 이미 그들 안에 있었다. 다만 그 지식이 손끝의 습관까지 내려오지 못했을 뿐이다.

1학년 박OO가 멋쩍게 웃으며 한 말이 그 간극을 정확히 짚었다.

"다 아는 건데요, 사실. 근데 알면서도 그냥 나와요. 게임하다 보면 '야 이 OO아' 이런 말이 그냥 입에서 튀어나와요. 나쁜 뜻 없이. 근데 오늘 조롱의 문장을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니 앞으론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입에 붙어 버린 말. 아이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 정직함이야말로 교육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틈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바뀌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라야, '이제 안 그러겠다'로 갈 수 있다.

역사교사인 나에게 그 아이들의 고백은 특별하게 들렸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5·18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 참사 같은 역사적 사건과 아픔이 온라인에서 '짤'로 소비되는 현실을 취재하고 글로 써 왔다. 고교 야구장에서 터져 나온 지역 비하 응원 구호, 온라인에 넘쳐나는 참사 조롱 밈, 특정 집단을 겨눈 혐오 표현의 놀이화.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 왜곡은 완강하고, 때로 조직적이며, 좀처럼 방향을 틀지 않는다.

그런데 열다섯 살 아이는, 혐오와 조롱의 말을 긍정과 존중의 말로 고쳐보고 스스로 말을 바꿨다. 교실에서 백 마디 설명으로도 넘지 못하던 벽을 그 작은 도전이 넘어서는 장면 앞에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고 또 조금 벅찼다. 어른이 못 한 일을 아이가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안다. 이 문제가 부스 몇 개로 풀릴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을 조롱으로 떠미는 힘의 상당 부분은 아이들 바깥에 있다. 클릭을 먹고 자라는 알고리즘, 혐오를 재미로 포장해 파는 콘텐츠, 끝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남을 깎아내려야 내가 서는 구조. 이 거대한 톱니바퀴를 그대로 두고 아이들에게만 "착해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사회를 탓하며 손을 놓고 있기에는, 지금 이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절실하다. 조롱은 이미 초등학교 교실까지 내려왔고, 놀림 당한 아이가 학교를 떠나기도 하며, 때로는 삶을 놓는다는 소식이 해마다 들려온다. 구조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매일 상처받고 있다. 구조를 바꾸는 일과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둘 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구조가 내 손 밖의 일이라면, 교실은 분명히 내 손 안의 일이다. 나는 그 손 안의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완벽한 다짐이 아니라, '정직한' 다짐

완벽한 다짐이 아니라, 정직한 다짐 아이들은 '나는 원래 깨끗하다'고 서명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말을 해 봤고, 이제부터는 멈춰 보겠다'고 서명했다.
▲완벽한 다짐이 아니라, 정직한 다짐 아이들은 '나는 원래 깨끗하다'고 서명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말을 해 봤고, 이제부터는 멈춰 보겠다'고 서명했다. 이종관

이날 서약 배너를 채운 이름들은 완벽한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직한 고백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나는 원래 깨끗하다'고 서명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말을 해 봤고, 이제부터는 멈춰 보겠다'고 서명했다.

서약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재미로라도 남의 아픔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겠습니다. 혐오와 조롱의 밈을 따라 하지도, 퍼뜨리지도 않겠습니다." 이 문장을 소리 내 읽고 이름을 적은 아이들 중에는, 복도에서 "이거 진짜 지켜야 되냐"며 웃던 그 아이도 있었다.

버릇은 하루 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 그래서 그들의 다짐은 "안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노력하겠습니다"였다. 나는 그 미완의 다짐이 완성된 선언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러웠다. 교육은 완성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이들은 분명히, 조금 방향을 틀었다.

캠페인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나는 명치가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말과 행동이 거칠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들이다. 수업 시간에 나를 애먹이고, 복도에서 서로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던 바로 그 아이들이, 사인펜을 눌러 제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 느린 손끝을 나는 교사로서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조롱을 멈추는 힘은 처벌이나 훈계가 아니라, '내가 웃어넘긴 그 말이 누군가에겐 무게였다'는 깨달음에서 나온다. 그날 부스 앞의 아이들은 그 무게를 제 손으로 한 번씩 들어 봤다. 말의 무게를 아는 아이는, 적어도 그 말을 예전처럼 가볍게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바뀔 수 있다

교직 13년, 나는 세상이 교사에게 거는 기대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를 지나왔다. 교사가 무엇을 한들 바뀌겠냐는 냉소도 안다. 그런데 그날 나는 다시 확인했다. 아이들은 아직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장 앞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매일 그들 곁에 서 있는 교사다. 사회가 병들었다고 진단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병든 사회 한복판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방향을 틀어 주는 일은 결국 교육의 몫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거친 말들 사이에서도 멈출 줄 알게 된 이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는 교사들, 거기에 있다.

*경기도 성남시 영성중학교 역사동아리 '피스메이커스'는 5·18 민주화 운동, 세월호 등 역사적 아픔이 온라인에서 밈으로 소비되는 현실에 문제 의식을 갖고,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평화·존중 교육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영성중학교 역사교사이자 〈피스메이커스〉 지도교사입니다.
#영성중학교 #존중캠페인 #존중과이해 #혐오와조롱 #피스메이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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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역사를 가르치고, 집에서는 8살 딸 지수와 6살 아들 지호에게 인생을 배우는 아빠. 첫째 출산 후 육아휴직을 하고 블로그에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과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며 가장 자연스러운 나를 만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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