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이야? 조롱이야? 경계선 투표존에서 스티커를 붙이는 학생들 "장난이면 조롱이 아니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무엇이 문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종관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세대의 조롱을 '무지'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오래전부터 느껴 왔다. 아이들은 몰라서 조롱하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그 앎이 몸에 닿지 않아서 조롱한다.
그날 부스에서 그 사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OX 퀴즈는 혐오와 조롱에 관한 문항을 아이들이 직접 읽고 답을 맞혀 보는 방식이었다. "장난이라고 하면 조롱이 아니다"라는 문항에,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X를 골랐다. "온라인 밈이면 따라 써도 된다"에도, "역사적 참사를 드립 소재로 쓰는 것도 표현의 자유다"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답을 몰라서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식은 이미 그들 안에 있었다. 다만 그 지식이 손끝의 습관까지 내려오지 못했을 뿐이다.
1학년 박OO가 멋쩍게 웃으며 한 말이 그 간극을 정확히 짚었다.
"다 아는 건데요, 사실. 근데 알면서도 그냥 나와요. 게임하다 보면 '야 이 OO아' 이런 말이 그냥 입에서 튀어나와요. 나쁜 뜻 없이. 근데 오늘 조롱의 문장을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니 앞으론 고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입에 붙어 버린 말. 아이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 정직함이야말로 교육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틈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바뀌지 않는다. '나도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라야, '이제 안 그러겠다'로 갈 수 있다.
역사교사인 나에게 그 아이들의 고백은 특별하게 들렸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5·18 민주화 운동과 세월호 참사 같은 역사적 사건과 아픔이 온라인에서 '짤'로 소비되는 현실을 취재하고 글로 써 왔다. 고교 야구장에서 터져 나온 지역 비하 응원 구호, 온라인에 넘쳐나는 참사 조롱 밈, 특정 집단을 겨눈 혐오 표현의 놀이화.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 왜곡은 완강하고, 때로 조직적이며, 좀처럼 방향을 틀지 않는다.
그런데 열다섯 살 아이는, 혐오와 조롱의 말을 긍정과 존중의 말로 고쳐보고 스스로 말을 바꿨다. 교실에서 백 마디 설명으로도 넘지 못하던 벽을 그 작은 도전이 넘어서는 장면 앞에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고 또 조금 벅찼다. 어른이 못 한 일을 아이가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안다. 이 문제가 부스 몇 개로 풀릴 만큼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을 조롱으로 떠미는 힘의 상당 부분은 아이들 바깥에 있다. 클릭을 먹고 자라는 알고리즘, 혐오를 재미로 포장해 파는 콘텐츠, 끝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남을 깎아내려야 내가 서는 구조. 이 거대한 톱니바퀴를 그대로 두고 아이들에게만 "착해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사회를 탓하며 손을 놓고 있기에는, 지금 이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절실하다. 조롱은 이미 초등학교 교실까지 내려왔고, 놀림 당한 아이가 학교를 떠나기도 하며, 때로는 삶을 놓는다는 소식이 해마다 들려온다. 구조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매일 상처받고 있다. 구조를 바꾸는 일과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둘 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구조가 내 손 밖의 일이라면, 교실은 분명히 내 손 안의 일이다. 나는 그 손 안의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완벽한 다짐이 아니라, '정직한' 다짐

▲완벽한 다짐이 아니라, 정직한 다짐 아이들은 '나는 원래 깨끗하다'고 서명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말을 해 봤고, 이제부터는 멈춰 보겠다'고 서명했다.
이종관
이날 서약 배너를 채운 이름들은 완벽한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직한 고백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나는 원래 깨끗하다'고 서명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말을 해 봤고, 이제부터는 멈춰 보겠다'고 서명했다.
서약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재미로라도 남의 아픔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겠습니다. 혐오와 조롱의 밈을 따라 하지도, 퍼뜨리지도 않겠습니다." 이 문장을 소리 내 읽고 이름을 적은 아이들 중에는, 복도에서 "이거 진짜 지켜야 되냐"며 웃던 그 아이도 있었다.
버릇은 하루 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 그래서 그들의 다짐은 "안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노력하겠습니다"였다. 나는 그 미완의 다짐이 완성된 선언보다 훨씬 더 믿음직스러웠다. 교육은 완성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방향을 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날 아이들은 분명히, 조금 방향을 틀었다.
캠페인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나는 명치가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말과 행동이 거칠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들이다. 수업 시간에 나를 애먹이고, 복도에서 서로에게 험한 말을 쏟아내던 바로 그 아이들이, 사인펜을 눌러 제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 느린 손끝을 나는 교사로서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조롱을 멈추는 힘은 처벌이나 훈계가 아니라, '내가 웃어넘긴 그 말이 누군가에겐 무게였다'는 깨달음에서 나온다. 그날 부스 앞의 아이들은 그 무게를 제 손으로 한 번씩 들어 봤다. 말의 무게를 아는 아이는, 적어도 그 말을 예전처럼 가볍게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바뀔 수 있다
교직 13년, 나는 세상이 교사에게 거는 기대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를 지나왔다. 교사가 무엇을 한들 바뀌겠냐는 냉소도 안다. 그런데 그날 나는 다시 확인했다. 아이들은 아직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장 앞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매일 그들 곁에 서 있는 교사다. 사회가 병들었다고 진단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병든 사회 한복판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방향을 틀어 주는 일은 결국 교육의 몫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 거친 말들 사이에서도 멈출 줄 알게 된 이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는 교사들, 거기에 있다.
*경기도 성남시 영성중학교 역사동아리 '피스메이커스'는 5·18 민주화 운동, 세월호 등 역사적 아픔이 온라인에서 밈으로 소비되는 현실에 문제 의식을 갖고,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평화·존중 교육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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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역사를 가르치고, 집에서는 8살 딸 지수와 6살 아들 지호에게 인생을 배우는 아빠. 첫째 출산 후 육아휴직을 하고 블로그에 육아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과 세상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하며 가장 자연스러운 나를 만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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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OO아' 이런 말이 그냥 튀어나와요" 열다섯 남학생들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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