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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열매 지킬 준비 중인 꽃, 자세히 봐야 보입니다

밤나무 암꽃을 관찰하기 위해 찾은 작은 텃밭...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등록 2026.06.26 11:44수정 2026.06.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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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봄보다 꽃이 많지 않다. 자귀나무와 능소화, 배롱나무, 무궁화가 꽃을 피우지만, 초여름 산과 들을 환하게 만드는 나무는 밤나무다. 6월이 되면 길게 늘어진 연노란 밤꽃이 온 나무를 뒤덮는다. 화려한 색은 아니어도 워낙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어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띈다.

밤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봄에 꽃을 피울 때도 서두르지 않았다. 봄볕을 받아 광합성을 하며 힘을 모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올해도 지난 봄 매화와 벚꽃이 그러했듯, 밤나무가 남쪽에서부터 차례로 여름의 시작을 알려왔다.


밤나무가 지금의 여름을 기다렸듯이 나 역시 밤나무꽃이 피길 기다렸다. 암꽃을 보기 위해서다. 그동안 숲을 걸으며 수없이 밤꽃을 보았다. 그런데 정작 밤나무의 암꽃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밤나무에는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따로 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걸음을 멈추고 암꽃을 찾아본 적은 없었다. 사진으로만 접했던 작은 암꽃을 올해는 직접 보고 싶었다.

밤나무를 찾아서

작은 텃밭 주변에서 자라는 밤나무 텃밭에서 일하던 처음 만난 할머니와 밤나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작은 텃밭 주변에서 자라는 밤나무 텃밭에서 일하던 처음 만난 할머니와 밤나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전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신극채

아름드리 밤나무 밤나무가 너무 커서 눈높이에서 들여다볼 꽃이 없어 아쉬웠다.
▲아름드리 밤나무 밤나무가 너무 커서 눈높이에서 들여다볼 꽃이 없어 아쉬웠다. 신극채

평소 눈여겨보았던 밤나무를 찾아갔다. 주변에서 가장 크고 꽃도 흐드러지게 핀 나무였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가보니 문제가 있었다. 나무가 너무 커서 눈높이까지 내려온 가지가 없었다. 꽃은 머리 위 먼 곳에 매달려 있었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었다.

차를 몰아 동네를 돌아다닌 끝에 작은 텃밭에 서 있는 알맞은 크기의 밤나무를 발견했다. 마침 밤나무 곁에서 할머니 한 분이 수확한 마늘을 다듬고 계셨다. 밤꽃을 관찰하러 왔다고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다. 할머니는 손길을 멈추지도 않은 채 고개만 쓱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슈."


지천에 널린 밤꽃을 가까이 들여다보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영 실없어 보였을 것이다. 할머니의 무심한 허락을 받고 밤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밤꽃은 단출했다. 흔히 꽃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화려한 꽃잎은 보이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꽃차례를 따라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고, 꽃마다 가느다란 수술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멀리서 밤나무를 환하게 뒤덮은 것처럼 보였던 것은 수많은 수술이었다. 초여름 햇살을 받은 반투명한 수술은 더 맑게 빛났다. 그러고 보니 밤나무를 수없이 보아왔으면서도 수꽃 조차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암꽃을 찾기 시작했다. 도감에는 '꽃차례의 아래쪽에 달린다'고 적혀 있었다. 꽃차례를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에는 수꽃만 빼곡했고, 암꽃이 함께 달린 꽃차례는 드물었다.

겨우 암꽃 하나를 찾아냈다. 작고 꽃잎도 없어 생김새를 도감에서 미리 익히지 않았다면 꽃이라고 알아보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반투명한 암술대는 말미잘의 가느다란 촉수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초록빛 꽃싸개가 암술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은 여리고 부드럽지만 몇 달 뒤에는 밤알을 지키는 날카로운 밤송이가 될 부분이다. 벌써부터 자신이 품을 밤을 지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꽃의 수꽃과 암꽃 1. 수꽃은 길쭉한 꽃대에 다닥다닥 달린다. 꽃덮개는 꽃받침과 꽃잎을 합쳐서 부르는데, 주로 꽃받침과 꽃잎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때 쓴다. 수술은 수꽃마다 10개 안팎이며 꽃덮개 밖으로 길게 삐져나온다. 2. 암꽃은 꽃차례 밑둥에 달리다. 꽃싸개는 밤송이 가시로 변한다. 암술대는 꽃싸개 밖으로 길게 나온다.
▲밤꽃의 수꽃과 암꽃 1. 수꽃은 길쭉한 꽃대에 다닥다닥 달린다. 꽃덮개는 꽃받침과 꽃잎을 합쳐서 부르는데, 주로 꽃받침과 꽃잎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을 때 쓴다. 수술은 수꽃마다 10개 안팎이며 꽃덮개 밖으로 길게 삐져나온다. 2. 암꽃은 꽃차례 밑둥에 달리다. 꽃싸개는 밤송이 가시로 변한다. 암술대는 꽃싸개 밖으로 길게 나온다. 신극채

꽃이 많다고 벌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밤나무꽃에는 의외로 벌이 많지 않았다. 꽃이 한창이었고 밤꿀이 많이 판매되기에 꿀벌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간이 나타나는 곤충 몇 마리를 제외하면 한산했다.

꽃이 피었다고 언제나 벌이 몰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꿀이 많이 나오는 시기와 벌이 활동하는 시간대, 주변에 피어 있는 다른 꽃 등 여러 조건에 따라 곤충의 발길도 달라진다. 그날은 벌이 찾아올 시간과 내가 찾아간 시간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밤나무는 이처럼 벌이나 곤충이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도 대비책을 세워두었다. 곤충과 바람을 함께 이용해 꽃가루받이를 한다. 화려한 꽃잎 대신 수많은 꽃을 피우며, 길고 가느다란 수꽃차례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수많은 꽃에서 나온 꽃가루가 흩어지기에 쉬운 구조였다. 벌과 곤충이 찾아오면 그들의 몸을 빌리고, 찾아오지 않는 순간에는 바람의 손길을 빌린다.

꽃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아이고, 허리야."

할머니가 굽혔던 무릎과 허리를 천천히 폈다. 여전히 밤나무 아래에서 서성이고 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머쓱한 마음에 얼른 "올해는 밤꽃이 풍성해서 밤 풍년이겠어요"라는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허리에 얹었던 손을 내리며 꽃이 핀 밤나무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나직이 말했다.

"나무는 작아도 큰 밤이 주렁주렁해.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 올해도 저렇게 꽃을 피운 걸 보니 굵은 놈들이 들었겠어."

할머니에게 밤나무는 그저 열매를 내어주는 나무가 아니었다. 해마다 잊지 않고 꽃을 피워내고, 비록 작은 밤이 열렸을지언정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늘 굵은 밤을 영글어 주는 대견한 존재였다.

밤꽃과 곤충 1. 내가 찾아갔을 때는 벌이 밤꽃을 많이 찾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벌이 찾아올 조건이 맞지 않은 듯하다. 2. 밤나무 잎에 사는 진딧물을 찾아 개미들이 한 마리씩 줄을 지어 모여들었다.
▲밤꽃과 곤충 1. 내가 찾아갔을 때는 벌이 밤꽃을 많이 찾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벌이 찾아올 조건이 맞지 않은 듯하다. 2. 밤나무 잎에 사는 진딧물을 찾아 개미들이 한 마리씩 줄을 지어 모여들었다. 신극채

어머니가 건네준 밤 한 톨

꽃이 핀 밤나무와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보다가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고향 옛집 대나무밭 한쪽에도 아름드리 밤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어머니는 밤을 주둥이가 좁은 항아리에 보관했다. 제사나 명절 상에 올릴 귀한 밤이었다. 함부로 꺼내 먹지 못하고 아껴두어야 했다.

그래도 겨울이면 어머니는 어쩌다 항아리에서 밤을 꺼내 쪄주셨다. 작은 수저로 떠 먹여도 되었을 텐데도 꼭 껍질을 벗기고 칼로 속껍질까지 말끔히 깎았다. 노란 밤 한 톨을 통째로 내 입에 넣어주셨다. 그때는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받아먹는 통밤이 그냥 당연했다.

초여름 작은 텃밭에서 만난 할머니와 밤나무는 잠잠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헤집어 놓았다. 며칠 동안 여름 감기를 앓으며 생각해 두었던 밤꽃 이야기를 글로 썼다. 비록 그리움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마음 한 자락을 글로 풀어냈다. 올여름 밤꽃은 여름을 시작하는 꽃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 그리움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게 한 선물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밤 #밤꽃 #밤나무 #밤꽃향 #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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