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매일 아침 내 발 잡아준, 86만 유튜버 선생님의 정체

흐릿한 수경 너머로 들어온 이름... 칭찬 한 마디에 다시 레인으로 달려갑니다

등록 2026.06.09 20:33수정 2026.06.09 20:33
3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지독한 근시입니다. 안경을 벗고 수경을 쓰는 순간, 세상은 형태만 겨우 남은 뭉개진 수채화로 변합니다. 레인도 흐릿, 앞 사람도 흐릿, 앞에 서 계신 선생님도 그저 푸른 물빛 속의 아련한 실루엣일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말, 이 흐릿한 시력이 제게 기막힌 반전과 함께 선물 같은 순간을 안겨주었습니다.

매일 아침 7시마다 저를 지도해 주는 참 고마운 선생님이 계십니다. 지상에서는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귀에 쏙쏙 박히게 영법을 쪼개어 가르쳐 주시고, 수업 중에는 직접 물속으로 입수 해서 회원 개개인의 서툰 자세를 일일이 잡아주시는 참 좋은 선생님이십니다. 그 친절한 가르침 덕분에 새벽 수영이 날로 즐겁고 좋아졌지만, 제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었습니다. 일명 '평포자(평영 포기자)'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모았다가 미는 평영은 힘을 빼고 가면 가장 편안한 영법이지만, 속도를 내려는 순간 난이도가 급상승합니다. 똑같이 발을 차는데 어떤 사람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쭉쭉 나아가고, 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용을 써도 제자리에 둥둥 떠 있기 일쑤입니다. 자유형이나 접영 때는 나름 선두권을 유지하며 호기롭게 물살을 가르다가도, 평영만 시작하면 자진납세하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레인의 맨 뒷자리로 도망치곤 했습니다.

흐릿한 수경 너머로 들어온 것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발차기를 하며.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발차기를 하며. thomascpark on Unsplash

그날 아침도 어김없이 평영 수업이었습니다. 다른 회원 분들의 속도를 당해내지 못해 결국 맨 뒷자리로 물러서면서도, 마음가짐 만큼은 여느 때와 달랐습니다. 비록 꼴찌 자리에 서 있을지언정, 선생님께 오늘 만큼은 잘해내 보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영혼을 갈아 넣으며 필사적으로 물을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종아리가 터질 것 같고 굳어버린 골반이 비명을 질렀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이토록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찬 발차기가 또 있었을까요.

그 눈물겨운 사투가 통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 앞에 물속으로 직접 입수한 선생님이 성큼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 발을 붙잡으셨습니다. 발 안쪽 면으로 물을 밀어내야 한다며, 제 발목 각도를 직접 꺾어 쥐고 정교하게 교정해 주시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코앞까지 다가온 선생님의 하얀 수모 위에 적힌 영문 글자가 흐릿한 수경 너머로 가만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The POS(더 포스)' 그때는 숨이 가쁘기도 했고, 그저 디자인이 예쁜 수모이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지만 물 밖으로 나와서도, 강습이 끝나고 탈의실로 향하는 내내 그 낯익은 글자가 이상하게 잔상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습니다.


'어디서 분명히 봤는데...'

마침내 샤워를 마치고 나와 안경을 코끝에 걸쳐 쓴 순간, 뇌가 빛의 속도로 흩어져 있던 연결고리를 찾아냈습니다. 멈춰 있던 기억의 전구가 탁 켜졌습니다. 등줄기에 기분 좋은 소름이 확 돋았습니다.


더포스(The POS). 수영을 다시 시작한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매번 영상을 돌려보며 "평영 킥은 이렇게, 팔 돌리기는 저렇게" 화면이 닳도록 '열공' 했던, 무려 86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독보적인 수영 유튜버 '연포스' 선생님. 그분이 바로, 매일 새벽 제 서툰 발을 잡아주고 계셨던 우리 선생님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채널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선수 시절 평영 국가대표 상비군. 모니터 속 인물인 줄로만 알았던 대한민국 대표 수영 유튜버가 매일 새벽 제 레인 앞에 서 계셨다니. 이 기막힌 확률과 반전 앞에, 탈의실 거울을 보며 혼자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켰습니다.

만약 제가 도수 있는 수경을 끼고 선명한 세상만 보고 있었다면 오히려 무심히 지나쳤을 수모가, 흐릿한 시야 덕분에 오롯이 그 영문자에만 시선이 꽂힌 셈이니, 참 기분 좋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완벽한 시야를 가졌다면 놓쳤을 선물을, 흐릿한 눈이 건져 올린 격입니다.

칭찬은 쉰 살의 중년도 춤추게 합니다

행운의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강습 후반부, 선생님이 수중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 피드백을 주시다가 회원들이 모인 앞에서 한마디를 건네셨습니다.

"우리 회원님이 그나마 평영 자세는 제일 좋으세요."

'그나마'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붙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평영 대가에게 공인받은 칭찬이었으니까요. 맨 뒷자리로 물러났지만 혼자 끙끙대며 발버둥 쳤던 그 모든 피로와 아쉬움이 단숨에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수영장 물빛이 그렇게 싱그럽고 푸르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흔한 격언이 아니라 과학이었습니다. 제 나이 쉰, 지천명(知天命) 즈음이 되면 세상은 우리에게 주로 누군가를 평가하고 책임져야 하는 엄숙한 의무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매일 쏟아지는 역할과 책임의 무게를 처리하다 보면, 칭찬이나 격려를 들을 일은 어느새 아득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무뎌져 가던 중년의 자존감을 번쩍 깨운 건, 오직 내 몸의 정직한 땀방울로 받아낸 칭찬 한마디였습니다. 나이가 오십이 되어도 칭찬 한마디에 아이처럼 기분이 붕 뜨고, 더 잘해내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무척 신선하고 유쾌했습니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선생님께 "자세가 좋다"며 생애 첫 칭찬을 받은 제 평영 동작 촬영본. 이 한 장의 피드백이 저를 다시 뛰게 만들었습니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선생님께 "자세가 좋다"며 생애 첫 칭찬을 받은 제 평영 동작 촬영본. 이 한 장의 피드백이 저를 다시 뛰게 만들었습니다. 문현호

그 따뜻한 한마디에 제대로 흥이 나버린 저는, 그날 점심시간에 가방을 챙겨 혼자 수영장으로 다시 달려갔습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 늘 도망치곤 했던 평영 연습이었습니다. 킥판을 잡고 엎드려 무릎을 당겼다가, 발 안쪽 면으로 물을 힘차게 밀어내는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찬다'기보다는 '민다'는 감각, '된다, 이거다' 하는 찰나의 느낌을 온몸에 새기면서요. '평포자'가 자발적으로, 기꺼이, 즐겁게 평영을 연습하러 간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뜻밖의 행운들은 어쩌면 특별히 운 좋은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로또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요. 흐릿한 시야로도 기어이 물속으로 뛰어드는 성실함, 칭찬 한마디에 점심도 거르고 다시 레인으로 달려가는 순수한 열정. 그런 사람의 곁에 살짝 내려앉는 것이 바로 인생이 주는 가장 달콤한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도 수경을 씁니다. 세상이 다시 흐려지지만, 이제 그 흐릿함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잘 안 보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딱 왕복 한 바퀴만 더. 그리고 혹시 압니까. 흐릿한 물속 어딘가에서, 또 다른 선물 같은 우연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말입니다.
#수영 #더포스 #한강 #지천명 #한크스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투리는 여전하고, 마음 한켠엔 늘 바다가 있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 걷고 있지만, 그리움은 늘 남쪽을 향합니다. 조용한 산책길과 사소한 감탄 속에서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반칙 논란, 예매 전격 중단 된 '스파이더맨' 반칙 논란, 예매 전격 중단 된 '스파이더맨'
  2. 2 인테리어 공사 동의서 사인 받다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인테리어 공사 동의서 사인 받다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3. 3 "홍명보 전술 판단 돋보여" → " 스리백 고집이 화불러" "홍명보 전술 판단 돋보여" → " 스리백 고집이 화불러"
  4. 4 축구 혁신 그리고 박지성과 이영표 축구 혁신 그리고 박지성과 이영표
  5. 5 "그냥 웃긴 말인 줄 알았어요"... '5·18밈' 보던 학생이 고개숙인 이유 "그냥 웃긴 말인 줄 알았어요"... '5·18밈' 보던 학생이 고개숙인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