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학교 정문에 걸린 현수막, 34년 교직 중 이런 문구 처음

정보 공개와 투명성으로 되찾은 학교 공동체의 신뢰

등록 2026.05.15 10:57수정 2026.05.15 15:26
2
원고료로 응원
자전거 페달은 정직하다. 밟는 만큼 나아가고, 멈추면 이내 쓰러진다. 34년째 매일 아침 양재천을 달리는 내게 자전거는 단순한 운동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학교'라는 공동체의 운명과 닮아 있다. 누군가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붓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역동적인 공간 말이다.

제63회 스승의 날 아침, 맞바람은 유독 차가웠다. 평교사에서 출발해 공모 절차를 거쳐 교장이 된 나에게 '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맞는 세 번째 스승의 날. 현장의 교사로, 교감으로 수많은 오월을 지나왔지만, 책임자가 되어 맞는 이 날은 여전히 쑥스럽고 어깨가 무겁다.

최근 교육계의 풍경은 쓸쓸하다. 통계는 냉혹하게 현실을 증언한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2024학년도 교육활동 침해 심의 건수는 4,234건으로 5년 전보다 세 배 이상 늘었다. 또한 국회 교육위원회가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한 해에만 7,467명의 교사가 교단을 떠났다. 올해 스승의 날을 맞아 교사노동조합연맹이 전국 교사 7,18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교사 100명 중 단 5.6명만이 "사회로부터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녹음 버튼'부터 눌러야 하는 서글픈 교실에 서 있다.

커피차보다 뜨거웠던 학부모의 현수막 한 장

이런 살풍경 속에서 교장인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내 학교의 교장은 스승의 날 전날 아침 업무추진비인지 사비인지 모르겠지만 커피차를 불러 교직원들의 출근길을 기다렸다고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내 생일을 까먹고 빈손으로 맞이한 날 아침처럼 마음이 심란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선생님들을 위로한 것은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학교 정문에 걸린 학부모회의 현수막 한 장이었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로봇고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학부모들이 스승의 날에 내건 현수막 서울로봇고 학부모 일동이 학교 정문에 내건 현수막,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로봇고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출근하는 교사들을 맞았다.
▲학부모들이 스승의 날에 내건 현수막 서울로봇고 학부모 일동이 학교 정문에 내건 현수막,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로봇고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는 문구가 출근하는 교사들을 맞았다. 오성훈

현수막을 미처 보지 못하고 출근했을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나는 학부모회 담당부장에게 현수막 사진을 찍어 전체 교직원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커피차 대신 드릴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34년 교직 생활 동안 수많은 환영사를 봤지만, 이 문장은 달랐다. 교사를 '성과'가 아니라 '존재'로 바라본 최초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가 지난해 학교평가에서 학생, 학부모, 교직원 모두에게 '매우 우수' 판정을 받고, 특히 '학부모 민원 0건'이라는 기적 같은 기록을 세운 비결이 이 현수막 한 장에 응축되어 있었다.


사실 우리 학교는 기숙사형 학교라 부임 전만 해도 학부모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갈등의 핵심이 '정보의 비대칭성'에 있다고 보았다. 학교가 정보를 감출수록, 부모는 자녀의 단편적인 말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불신으로 이어진다. '모르면 두렵고, 두려우면 방어적이 되는 법'이다.

'민원 0건'의 비결, 유리벽 행정과 신뢰의 승리


그래서 나는 '유리벽 행정'을 시작했다. 공문 원문 공개율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매달 말이면 학교의 속살을 담은 '학교장통신'을 직접 편집 발행했다. "취업처 확보가 쉽지 않아 밤잠을 설친다"라는 교장의 솔직한 토로부터, "아이들의 급식 잔반이 줄어 대견하다"라는 소소한 칭찬까지 가감 없이 공유했다. 학교의 문턱을 낮추고 정보를 공동체의 자산으로 되돌려주자, 빗장을 걸어 잠갔던 학부모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민원 0건'은 학부모들이 불만이 없어서 만들어진 숫자가 아니다. 학교가 투명하게 고민을 공유할 때, 학부모님들이 '감시자'에서 '동반자'로 거듭나며 기꺼이 인내하고 응원해 주신 덕분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민원 0건은 학교가 잘해서가 아니라 학부모님이 학교를 믿어주었기에 가능했던 '신뢰의 승리'다.

스승의 날, 나는 학생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꽃 한 송이와 학부모님들이 보내준 그 문장을 가슴에 달았다.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웃고, 학부모가 믿어줘야 학교가 바로 선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을 것이다. 우리 학교라는 자전거가 '신뢰'라는 동력을 얻어 아이들의 미래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사 채택 후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스승의날 #학부모회 #서울로봇고 #민원제로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울로봇고등학교 교장. 『되풀이되는 비극, 따개비 현장실습』, 『디지털 대전환 시대 직업계고 미래는』 등 직업계고 학생들의 삶과 미래를 응원하는 글을 써왔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배우 활동의 마음 3% 정도... 무당으로서 우선 잘하고 싶어" "배우 활동의 마음 3% 정도... 무당으로서 우선 잘하고 싶어"
  2. 2 47년 동안 아내로부터 들은 가장 아픈 말 47년 동안 아내로부터 들은 가장 아픈 말
  3. 3 드라마 '참교육' 속 조폭 소굴이 된 학교... 34년차 교사의 시선 드라마 '참교육' 속 조폭 소굴이 된 학교... 34년차 교사의 시선
  4. 4 뱀이 스르륵, 고라니가 껑충… 여기 신도시 맞아? 뱀이 스르륵, 고라니가 껑충… 여기 신도시 맞아?
  5. 5 '계엄 목적, 북한 도발 유도' 윤석열 징역 30년...변호인단 울먹 '계엄 목적, 북한 도발 유도' 윤석열 징역 30년...변호인단 울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