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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몇 해 뒤엔 현장에 있던 동료에게서 더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승의 날, 아이들이 용돈을 십시일반 모아 준비한 작은 케이크를 받고 교실에서 함께 촛불을 불었던 교사가 누군가의 민원으로 교육청 조사를 받고 주의 처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부패했기 때문에 징계를 감수해야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차가운 법전의 문장보다 촛불을 켜고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먼저 읽었을 뿐이다. 규정의 언어로는 명백한 위반일지 모르나, 교육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스승과 제자가 나눈 '정서적 연대의 의례'였다. 만약 그가 "법 때문에 안 된다"며 케이크를 든 아이의 손을 내쫓았다면, 행정적 청렴은 지켰겠지만 교실을 떠받치던 신뢰의 온기는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기계적 제도가 낳은 끔찍한 역설과 마주했다. "타인의 얼굴 앞에서 응답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윤리"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흙 묻은 돼지감자를 들고 서 있던 아이의 붉어진 뺨과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설레던 아이들의 눈빛. 그 얼굴을 외면한 채 법조문만을 방패 삼는 일은 행정적으로는 올바를지 몰라도, 윤리적으로는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차가운 폭력이다.
이제 교사들은 아이의 진심을 어떻게 부드럽게 거절할지, 혹은 그 마음을 어떻게 다치지 않게 어루만질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김영란법 때문입니다" 한 줄이면 모든 설명이 끝나는 교실이 되어 있었다. 법은 부패를 막는 방어막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체온을 차단하는 벽이 되어가고 있다.
청렴과 비정 사이에서
청렴과 비정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깨끗함을 유지하려다 온기를 잃는 순간, 교육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오류를 통제하는 '관리'로 전락한다. 부당한 뇌물을 단호히 잘라내는 공적 엄정함과, 타인의 다정한 마음마저 베어버리는 비정함은 분명 다른 층위의 문제다. 그러나 지금의 기계적인 시스템은 그 미세한 온도의 차이를 헤아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교육은 냉혹한 심판대가 아니라 흠결 있는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공간이어야 한다. 교실은 점점 '무균실'이 되어간다. 깨끗하지만 숨 막히는 공간, 고마움도 미안함도 오갈 수 없는 완전 멸균된 관계. 그 안에서 자라는 건 신뢰가 아니라 불신의 공기다.
완벽하게 멸균된 교실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제도의 깨끗함이 사람의 체온을 밀어낸다면 그곳은 학교가 아니라 박제된 공간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다칠지도 모르는 관계의 현장에 남아 있으려 한다. 숫자로 기록되는 무결함보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책임을 철저히 감당하는 일. 그것이 무균실이 되어버린 교육이 끝끝내 잃지 말아야 할 마지막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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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걱정이 많습니다. 또한 교육의 본질 회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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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들고 학교 간 아이, 교사가 거절하며 건넨 씁쓸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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