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마당 데크를 걷어내자 나온 것, 십수 년을 모르고 살았네

딸아이가 외국으로 떠나고 부부만 남은 집에 꽃과 나무를 들이다

등록 2026.05.16 18:53수정 2026.05.16 18:53
6
원고료로 응원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5월엔 '어른이 되는 계절'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반년 전, 딸아이가 석사 과정을 위해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스터 클래스로 유럽을 오갈 때는 늘 '다녀온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번에는, 돌아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딸이 떠난 날, 집이 텅 비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길게 울렸고 집안의 공기는 적막했다.

딸이 없는 집은 소리가 줄었다. 아침에는 먼저 깨어 움직이는 소리가 없었고, 저녁이면 도어락 소리와 함께 들려오던 "엄마, 나 왔어!" 하는 딸의 음성이 끊겼다. 식탁 위에는 접시 하나가 남았고 세탁기 바구니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아파트를 정리하고 이사 온 주택. 딸이 없는 집이 원래 이렇게 큰 공간이었나 싶었다. 고요해진 집은 마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아주 천천히 내쉬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의 호흡도, 발걸음도 느려지는 듯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켜자, 초침이 멈춘 벽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시계만 멈춘 게 아니었다. 이 집의 시간도 함께 멈춘 것 같았다. 그날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집 가운데 중정 마당이 작게 있었는데 그쪽 창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거의 돌보지 않던 자리였다. 낡은 데크와 먼지가 쌓인 철재 의자가 버려진 듯 구석에 놓여 있었다. 집안도 중정 마당도 지나치게 조용하기만 했다. 이대로 두면 이 고요가 우리를 잠식할 것 같았다.

"중정을 싹 정리하자."

남편도 우리 부부에게 무언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지도 몰랐던 공간의 발견

며칠 뒤, 공사가 시작됐다. 낡은 데크가 하나씩 뜯겨 나갔다. 먼지가 올라오고, 묵은 냄새가 퍼졌다. 툭. 툭. 낡은 데크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데크를 걷어내고 우리는 당황스러움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멈춰 있던 자리를 걷어내자 드러난 연못자리. 낡은 데크를 걷어내자, 드러난 연못자리. 우리는 십수년간 이 자리가 있었는지 모른 채 살아왔다.
▲멈춰 있던 자리를 걷어내자 드러난 연못자리. 낡은 데크를 걷어내자, 드러난 연못자리. 우리는 십수년간 이 자리가 있었는지 모른 채 살아왔다. 이수정

그 아래에, 연못 자리가 있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둥글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비어 있었다. 한때 물을 채워두고 잉어가 유유히 헤엄쳤을 자리. 어쩌면 옥잠화도 떠 있었겠지. 우리는 그런 자리가 있었는지도 모른 채, 십수년을 살았던 것이다.

둥그렇게 자리 잡은 바위들은 시멘트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남편이 팔을 걷어붙였다.

"이건 내가 옮긴다. 운동한 보람을 보여줄게."

남편은 자신만만하게 팔근육을 뽐내며 호기롭게 바윗돌을 붙들었다. 한참을 힘을 줬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끙끙' 기압 소리는 높아졌으나 무심한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결국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뭔가 내 마음 깊숙한 곳이 뜨거워졌다. 딸이 떠난 뒤 드러난 공간. 우리가 몰랐던 시간의 흔적. 그 자리는 마치 '텅 빈 둥지' 같았다. 우리는 연못을 다시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덮어버리기도 싫었다. 그 자리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그 자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비어 있는 자리가 꼭 사라진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원을 만들자. 우리만의 비밀의 화원!"

우리 부부의 대화는 꽃 이름과 흙 이야기로 가득해졌다. 우리는 오랜만에 분주해졌다. 비어 있던 연못 자리가 흙으로 채워졌다.

빈자리가 꽃들로 채워졌다. 연못자리를 흙으로 채우고 봄꽃들을 심자, 빈자리는 생명으로 가득 찼다.
▲빈자리가 꽃들로 채워졌다. 연못자리를 흙으로 채우고 봄꽃들을 심자, 빈자리는 생명으로 가득 찼다. 이수정

봄 기운 완연한 4월, 우리의 주말은 중정을 단장하는 재미로 채워졌다. 튤립과 무스카리, 수선화, 로벨리아, 마가렛트, 옥매화... 갖가지 봄꽃들을 심었고 작은 백일홍 묘목도 한 그루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비어 있던 자리가 생명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앞다투어 피어나는 꽃들 사이로 앙증맞은 꿀벌들이 노닐었다.

밤이 되면 별무더기가 내려온다. 꼬마 앵두전구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 이곳은 우리 부부만의 낭만 포차가 된다.
▲밤이 되면 별무더기가 내려온다. 꼬마 앵두전구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 이곳은 우리 부부만의 낭만 포차가 된다. 이수정

태양광 꼬마 앵두 전구도 설치했다. 밤이면 별무더기가 내려 앉은 듯 중정이 보석처럼 빛났다. 앵두 전구가 반짝이는 중정의 밤은 우리 부부만의 낭만 포차가 되기도 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거나 때로는 와인 잔을 부딪히기도 하는 그 시간, 그 공간은 이제 더 이상 멈춘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소식이 없어?"
"정말 잠꾸러기가 맞긴 맞나 보네."

그 가운데 우리의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문 것은 '다이너마이트 백일홍 묘목'이었다. 어린 묘목이어서 나무 기둥도 가지도 여리기만 했다. 별명이 '잠꾸러기'라고 하던데 역시나 하루가 다르게 만개하는 봄꽃들 사이에서 백일홍 나무는 4월 내내 여전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였다. 아침저녁으로 우리는 백일홍 가지를 살폈다. 혹여나 말라버린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백일홍의 가지를 살피며 나는 문득 런던의 딸아이를 생각했다. 낯선 공기, 생소한 언어 속에서 딸아이도 이 백일홍처럼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뿌리 끝부터 힘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시간들

4월이 지나고 5월이 시작되자, 봄꽃들은 하나둘 더욱 짙어진 잎사귀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꽃의 화려함도 좋지만, 더욱 따스해진 햇살 아래에서 푸른 잎사귀들이 춤추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잠꾸러기 백일홍 나무가 기지개를 켰다. 앙증맞은 연한 잎사귀가 빼꼼 고개를 두어 개 내밀던 날, "와, 드디어 나왔구나!"

나는 중정이 울리도록 환호했다. 오랜 잠에서 깬 백일홍은 하루가 다르게 싹을 틔워 냈다. 다이너마이트 백일홍이라더니, 잎사귀 끄트머리마다 붉은 기운이 번져 마치 꽃이 피기 전부터 이미 꽃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아침저녁으로 기대와 설렘으로 백일홍 나무를 살폈다. 마치 딸을 키우며 매 순간 가슴 벅찼던 그 기쁨의 기억들이 백일홍 잎사귀 위로 겹쳐졌다.

"이것 봐, 너무 신기하지? 백일홍이 이렇게 많이 자랐어. 봐봐, 로벨리아는 아직도 이렇게 꽃이 풍성하고 예쁘지!"
"우와, 너무 예쁘다. 아빠, 그 옆에 있는 것은 뭐야?"

남편은 딸과 영상통화를 하며 낮은 포복 자세로 중정의 꽃밭 여기저기를 비춰주었다. 딸과 아빠의 대화 소리가 내 귀와 마음에 단비처럼 스며든다. 환하게 웃는 딸의 얼굴 위로 런던의 햇살이 비쳤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다시 흐르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딸도 그곳에서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낯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떠난 이 공간, 이 시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 머물 수 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나이대의 많은 부모들도 각자의 빈자리에 다른 무엇을 채워가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제보다 백일홍 나무는 더욱 풍성해졌다. 곧 붉은 꽃망울을 피워낼 것만 같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백일홍 나무 백일홍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무성해지는 잎사귀에는 붉은 꽃잎 색이 번져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백일홍 나무 백일홍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무성해지는 잎사귀에는 붉은 꽃잎 색이 번져있다. 이수정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이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똘망똘망하게, 유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게 살아온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빈자리 #빈둥지 #중정마당 #비밀화원 #백일홍나무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동상담센터 원장이자 언어치료사 심리상담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뜻한 치유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공동저서 '글루미릴레이' 공동저서를 출간했습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배우 활동의 마음 3% 정도... 무당으로서 우선 잘하고 싶어" "배우 활동의 마음 3% 정도... 무당으로서 우선 잘하고 싶어"
  2. 2 47년 동안 아내로부터 들은 가장 아픈 말 47년 동안 아내로부터 들은 가장 아픈 말
  3. 3 드라마 '참교육' 속 조폭 소굴이 된 학교... 34년차 교사의 시선 드라마 '참교육' 속 조폭 소굴이 된 학교... 34년차 교사의 시선
  4. 4 뱀이 스르륵, 고라니가 껑충… 여기 신도시 맞아? 뱀이 스르륵, 고라니가 껑충… 여기 신도시 맞아?
  5. 5 '계엄 목적, 북한 도발 유도' 윤석열 징역 30년...변호인단 울먹 '계엄 목적, 북한 도발 유도' 윤석열 징역 30년...변호인단 울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