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주어진 '스탠더드' 넘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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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연주해 온 '부모'나 '가장'이라는 역할도 사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종의 스탠더드 넘버다. 세상 모든 아재가 비슷한 악보를 받았지만, 그 악보를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달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음표 하나 틀리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고지식한 연주를 이어왔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 팍팍한 삶 속에서도 슬쩍슬쩍 자신만의 유머를 섞어 변주를 시도했을 것이다.
이제 며칠 뒤면 친구는 딸의 손을 사위에게 건네주고 자신이 쥐고 있던 '어른의 악보'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볼 나 역시, 이제는 그 빽빽한 의무의 악보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생 후반전은 우리에게 전무후무한 신곡을 써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평생 연주해 온 그 익숙한 삶의 멜로디 위에서, 이제는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나만의 '솔로 세션'을 즐겨보라고 권한다. "나는 평생 이렇게만 살았어"라는 말은 그간 내가 연주해 온 곡의 제목일 뿐, 남은 연주 방식까지 결정하는 족쇄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아재들은 '남들 만큼만' 하는 스탠더드 연주에 길들여져 있다. "앞장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앞 세대의 가르침은 개성 있는 변주를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하지만 재즈는 끊임없이 묻는다. "남들이 다 아는 그 노래 말고, 당신의 진짜 소리는 무엇인가?"라고.
낡은 체면이라는 악보를 잠시 덮고,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생각보다 쑥스럽고 어색할 것이다. 하지만 재즈 거장들은 나이가 들수록 기교는 덜어내고 소리의 깊이를 더한다. 젊은 날의 화려한 속주가 사라진 자리에, 인생의 온갖 풍파를 겪어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묵직한 한 음이 들어차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백전노장의 품격'이 아닐까.
'틀린 음'은 없다
지난날 통과해 온 그 힘들고 치열했던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를 옥죄던 수많은 '표준'의 날들이,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나만의 독특한 소리를 내기 위한 가장 단단한 공명이 된다. 남들이 다 아는 '빤한' 스탠더드 넘버를 연주하더라도, 그 마디마디에는 나만이 겪어온 삶의 주름과 투박한 손맛이 배어 나와야 한다. 그것이 진정 어른다운, 그리고 나다운 삶의 앙코르 무대가 될 것이다.
무대의 조명이 바뀌고 객석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재즈의 거장들이 무대 위에서 그러하듯, 내 곁을 지켜온 익숙한 사람들과 일상의 박자에 가볍게 발을 맞추며 나만의 첫 음을 내어보자. 화려한 기교는 없더라도, 비록 거칠고 투박한 음일 지라도, 그 소리에는 30년 넘게 '어른'으로 버텨온 나의 깊은 울림이 담겨 있을 테니까.
재즈에는 틀린 음(Wrong Note)이란 없다. 그 음을 다음 마디에서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기막힌 변주가 되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 왁자지껄 농담을 주고받을 친구들과 피로연의 술잔을 나누며, "그간 정답 없는 인생에서 정답을 찾느라 애썼다. 이제는 악보에 없는 엉뚱한 소리 좀 질러보자"며 건배를 해볼까 싶다. 재즈 같은 건 담 쌓은 녀석들이라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2차로 노래방 가자는 겨?"
[추천곡]

▲ 무대 위 객석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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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앨범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Columbia CL 1656)
곡명: Someday My Prince Will Come
라인업 : 마일스 데이비스(트럼펫), 행크 존스(피아노), 윈튼 켈리(피아노), 폴 체임버스(베이스), 지미 콥(드럼), 존 콜트레인(테너 색소폰)
녹음일 : 1961년 3월 20일, 뉴욕 콜롬비아 30번가 스튜디오
예쁜 동요가 어떻게 멋진 재즈 스탠더드 넘버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다. 원곡은 1937년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주제가. 누구나 아는 이 단순하고 예쁜 멜로디를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 역사상 가장 세련되고 지적인 곡으로 탈바꿈시켰다.
마일스는 원곡의 멜로디에 집착하지 않고 뼈대만 남겨 그 사이사이를 자신만의 고독하고 날카로운 트럼펫 음색으로 채운다. 이것이 바로 거장이 스탠더드를 대하는 태도다. 먼저 윈튼 켈리의 가벼운 피아노 전주가 흐르고 마일스의 트럼펫이 이어진다. 주목할 것은 그가 원곡의 멜로디를 연주할 때인데, 음을 다 부르지 않고 마디와 마디 사이를 살짝 밀고 당기며, 마치 "나 이 노래 알아, 하지만 내 방식은 이래"라고 말하듯 표현한다.
특히 중간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의 테너 색소폰 솔로를 놓치면 안 된다. 마일스가 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콜트레인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음의 파편들로 곡을 해체해 버린다. 똑같은 동요를 두고 두 천재가 보여주는 전혀 다른 해석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어떻게 변주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잘 알려진 동요를 재즈 명곡으로 바꿨듯, 우리도 평범한 일상을 가장 특별한 재즈 무대로 만들 수 있다. 왜냐면 거장은 아니어도, 우리는 인생의 백전노장이 아니냐.
[재즈 사전]
- 스탠더드(Standards) : 재즈 연주자라면 누구나 알고 연주하는 유명한 곡들. 연주자들에게는 일종의 '기본 악보'이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바탕이 된다. 우리 삶으로 치자면 결혼, 취업, 은퇴 같은 보편적인 생애 주기와 닮았다.
- 편곡(Arrangement) : 기존의 곡을 연주자의 의도에 맞게 리듬, 화성 등을 바꾸는 작업. 인생 후반전의 삶을 재설계하는 과정 역시 인생의 편곡이 아닐까.
- 솔로(Solo) : 협연 도중 한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구간. 조직이나 가족의 배경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인생 후반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솔로 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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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반전 접어든 당신, 결코 주눅 들 필요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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