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함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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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 앞에서 옷을 벗을 때면 여전히 살짝 주저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타인에게 알몸을 내보이는 일이 아주 익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공평하게 벌거벗은 채로 저마다의 목욕을 준비하는 모습에 금세 묘한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하나 가릴 것 없이 너나 나나 모두 벌거벗은 모습은 묘하게 평화롭기까지 합니다.
본격적인 입탕에 앞서 자리를 잡고 앉아 정성껏 몸을 씻습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로 외부의 먼지를 씻어내면, 비로소 입탕의 자격을 얻습니다. 미온탕에서 온탕으로,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는 열탕의 세계에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정복해 나가는 정직한 맛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끝만 살짝 담가 열기를 탐색하다가 서서히 반신욕으로 몸을 담그고, 마침내 온몸을 뜨거운 물속에 밀어 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 시원하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뜨거움을 시원함으로 받아들이는 이 감각이야말로 제가 세상을 견딜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처럼 느껴져 묘한 자부심이 차오릅니다.
한껏 달궈진 몸을 이끌고 습식 사우나의 육중한 유리문을 밀면, 훅 끼쳐오는 눅진한 온기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비 냄새'가 온몸을 감싸 안습니다. 눈앞을 가득 메운 하얀 미스트 속에 잡념을 흩트리고 있으면, 공중에 떠도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살결에 알알이 맺히는 촉각만이 선명해집니다.
반면 건식 사우나는 바짝 마른 나무 향이 지배하는 열기와 침묵의 방입니다. 투명한 모래시계 속 모래알이 스르륵 떨어지는 것을 보며 오직 나만의 박동에 귀를 기울입니다. 뜨거운 열기가 이마를 타고 흘러 턱 끝에 땀방울을 맺히게 할 때까지 그 정적을 견뎌내는 일은, 나를 정화하는 즐거운 시험이 됩니다.
좋은 날을 앞두고만 하는 세신은 목욕이라는 대서사시의 백미입니다. 옥색 베드 위에 몸을 뉘어 세신사분의 정성스럽고 전문적인 손길에 몸을 맡깁니다. 사그락사그락, 지난 계절의 우울과 어제의 피로를 밀어내면 갓 쪄낸 백설기처럼 보들보들한 살결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정말로 다시 태어나는 듯한 전율과 함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그렇게 온몸을 정갈하게 비워낸 뒤, 탕 속에 게으르게 축 늘어져 고요한 응시의 시간을 갖습니다. 오후 세 시의 나른한 햇살이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뚫고 환하게 쏟아지는 광경을 한참동안 멍하게 바라봅니다.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는 아득하게 들려오고 이마에는 기분 좋은 땀이 흐릅니다.
그 몽환적인 아지랑이 사이로 아빠 손을 꼭 쥐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늙은 아버지의 등을 정성껏 밀어주는 중년 아들의 묵직한 뒷모습이 보입니다. 저 풍경 속에 흐르는 생의 질서를 가만히 눈에 담습니다. 아빠 손에 이끌려 들어온 저 아이도, 언젠간 자라서 저 중년의 아들처럼 그의 아버지의 굽은 등을 보살피겠지요? 어느 멋진 해변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일광욕을 즐기는 유럽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순간입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평상에 대자로 누울 때, 선풍기 바람이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고 냉장고에서 막 꺼낸 바나나맛 단지 우유가 손바닥에 닿는 시원한 감촉은 완벽한 휴식의 마침표가 됩니다. 빨대를 '툭' 꽂아 그 달콤함을 한껏 들이켜는 순간, 비로소 오늘의 목욕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이런 다정하고 따뜻한 동네 목욕탕들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마음 한구석이 헛헛해집니다. 우리의 삶이 묻어있던 이 작고 소중한 공간들이 추억 속으로만 숨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최근 미국에서는 사우나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소통하는 '사우나 네트워킹'이 유행이라는데, 타인과 가장 정직한 모습으로 공평하게 만나 온기를 나누는 우리의 이 정겨운 문화야말로 그들이 찾는 본질적인 연결의 원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라져가는 이 공간들이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고, 다시금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다정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기분 좋은 반전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P.S : 가까운 동네 목욕탕을 방문해 그곳만이 가진 다정하고 따뜻한 감각들을 직접 느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덧붙여 제가 작년에 읽은 책들 중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는, 6699press에서 출판한 <서울의 목욕탕>도 함께 추천합니다.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품은 깊은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사진들로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서울의 목욕탕
6699press 편집부 (지은이), 박현성 (사진),
6699pres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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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는 여전하고, 마음 한켠엔 늘 바다가 있습니다.
서울 하늘 아래 걷고 있지만, 그리움은 늘 남쪽을 향합니다.
조용한 산책길과 사소한 감탄 속에서
느리게,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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