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지촌의 그늘을 넘어> 겉표지
삼인
속아서 기지촌으로 간 노씨의 기막힌 사연
노씨라고 불리는 한 여성은 1975년 서울역 근처에 있는 한 구인 광고를 보고 그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당시 19살이었던 그녀는 괜찮게 살던 집안이 그 즈음 모든 것을 잃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일자리가 없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전화를 걸자 사무직 일자리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특정 육교에서 광고를 들고 서 있으면 누군가 만나러 올 것이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남자는 구인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는 핑계로 그녀를 자신의 모텔방으로 데려갔습니다. 모텔에서 그는 가정부 자리가 있다며 그녀에게 배가 고픈지 물었고, 저녁 식사를 사주었습니다. 노씨는 나중에 그 저녁 식사와 모텔 숙박비가 자기 빚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친절함에 고마워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텔에 머물도록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강간하려 했지만, 그녀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물러섰습니다. 그녀는 그때 떠났어야 했다고 제게 말했지만, 일자리가 너무 절실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젊은 남녀를 만났습니다.
두 남자가 현금 보따리를 교환했고, 젊은 여자는 노씨를 따로 불러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아?" 노씨는 "가정부로 취직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언니뻘 되는 젊은 여자는 "팔린 거야. 그 현금 뭉치 봤지? 술집 주인이 널 산 거고, 그 매매가는 이제 네 빚이 된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노씨는 무지 놀랐습니다. 젊은 여자가 도망치라고 재촉했을 때는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냥 일하러 온 것뿐인데, 무슨 소리예요?" 노씨는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언니가 너무 간절히 말했기에 결국 노씨는 동의했습니다. 그녀는 언니가 알려준 대로 도망쳤습니다. 허나 붙잡혔습니다. 그녀와 젊은 언니는 둘 다 잔혹하게 구타당했습니다.
노씨는 캠프타운에서 일했던 첫날밤을 떠올렸습니다. 첫 손님의 이름은 바비였습니다.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녀는 제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배정된 방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포주가 키 크고 덩치도 큰 남자를 데려와 노씨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팔려 온 지가 며칠이 됐고 그녀는 여러 번 구타를 당했고, 저항할 기력마저 잃었습니다.
바비라는 남자는 그녀를 강간했습니다. 노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저 돈을 내고 매춘부와 섹스를 한 것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 남자는 그녀를 강간했고,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영혼까지 짓누르는 끔찍한 고통이었습니다. 강간은 그녀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혔고, 그녀는 며칠 동안 피를 흘렸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남자가 다른 사람, 자기 눈앞에 있는 한 여성을 그렇게 경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강간의 모든 사회적, 신체적 징후를 무시하고, 돈을 지불했으니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어떠한 마음으로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 후 노씨는 계속해서 도망치고, 붙잡히고, 구타당하고, 다른 기지촌에 다른 포주에게 팔려 가 다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일은 언제나 강간과 같았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군인이 그녀에게 호감을 보였고, 둘은 매우 가까워졌습니다. 주인은 둘을 떼어놓으려 했으나 그는 그녀의 빚을 갚아주고 몇 주 동안 작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다 한국 파병 기간이 끝나자 그는 떠났고, 몇 차례 생활비를 보내주다가 점차 끊었습니다. 그녀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가끔씩 군인들과 동거 계약을 맺으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노씨는 기지촌 출신 여성으로서 한국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미군과 계약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군인에게 선금으로 1500달러를 지불했고, 영주권을 받았을 때 1500달러를 추가로 지불했습니다. 군인이 먼저 미국으로 떠났고, 서류가 나오자 그녀는 텍사스의 한 군사 기지에서 그와 합류하여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부부처럼 살았습니다.
그녀는 3년 동안 군사 성매매 시스템에 갇혀 지냈고, 2년 동안은 기지촌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가끔씩 계약 여자친구로 일했습니다. 이제 1980년, 그녀가 고객이 되어 미군과 계약을 맺어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조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

▲ 1960~61년 인천 부평 애스컴시티(Ascom City) 앞 기지촌 풍경.
me&korea
조씨라고 불리는 이 여성은 제게 정식 인터뷰를 해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받았고,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 했고, 이러한 대화 방식이 타협점이었습니다.
노씨처럼 그녀도 속아서 기지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군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가족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형편도 어려워 몇 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 그녀는 한국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는 웨이트리스들이 영업시간 이후에는 유료 성매매를 해야 했습니다. 마치 기지촌의 술집 같았지만, 주인, 직원, 손님 모두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술집에서 일하다 만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몇 년 동안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그녀의 술집 경력을 문제 삼았고, 자기 아내가 기지촌 출신이었고 미군과 결혼했었다는 사실을 잊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심한 다툼이 벌어질 때마다 과거를 들먹였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혼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두 아이를 부양해야 했고, 전 남편의 양육비 송금은 점점 더 불규칙해지고 있었습니다.
술집 일은 웨이트리스나 한국 식품점 계산원 일보다 훨씬 돈을 잘 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 아이들이 직업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기 전에 돈을 모아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하길, 가장 힘든 건 수치심이었습니다. 자신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녀는 과거에 대한 자신의 수치심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군사화된 성매매 시스템은 채무 노예, 폭력, 감시, 그리고 수많은 인권 침해를 수반하며 국가 안보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학대합니다. 이러한 학대의 트라우마와 결과는 모든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특히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더욱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그들이 보상받고 존엄성을 되찾도록 돕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스템을 완전히 폐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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